한겨레 칼럼 [삶의 창] 나는 코다다

2016/07/23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나는 코다(CODA)다.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농인(청각장애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일컫는다. 엄마, 아빠는 내게 수어를 가르쳤고 나는 손으로 옹알이를 했다.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가 나의 모어였고 부모의 문화인 농문화가 나의 성장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청각장애인’이라고 부르며 쯧쯧 혀를 찼다. 그것을 아주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던 나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엄마, 아빠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착한 장애인’이 되었듯, 나 역시 ‘착한 장애인의 딸’이 되었다.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는 것이 그 올바른 예였다.

그런데 스물두살이 되어서야 나처럼 오기를 품고 살아왔던 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들은 나 같은 이들을 코다라고 부르고, 코다의 경험은 세계적으로 비슷하며, 외국의 경우 관련 연구와 지원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의 세상을 끊임없이 부정하다가도 사랑했던, 동시에 부모의 통역사이자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던 이들을 만났다. 아빠 대신 부동산에 전화해 전세와 보증금을 묻고 통역해야 했던 열살, 엄마와 함께 은행에 가 우리집의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어야 했던 아홉살, 부모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어떤 어른의 말을 부모에게 통역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던 열한살,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길을 걷다 마주친 엄마를 외면했던 열다섯살. 부모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이었다. 우리는 모임을 만들어 ‘코다 코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코다라는 것을 인정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이 나라를 벗어나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도 굳이 오기를 품고 살지 않아도 되는 코다들이 있다. 코다 영국(UK), 코다 홍콩, 코다 일본(Japan), 세계적으로는 코다 인터내셔널이라는 조직이 있다. 우리는 그중 코다 영국을 방문해 이 단체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어떤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여름에 열리는 코다 캠프에도 참가하기로 했다. 다른 캠프들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안내문을 보니 무려 84명의 청소년 코다와 20명의 성인 코다 자원활동가들이 참여한단다. 그들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33살이고, 우리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농인이야. 나는 영국 수어에 능숙하고, 이 캠프에서 더 많은 코다를 만나고 싶어.”

“나는 천체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코다야. 우리 코다 식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 무척이나 기대돼.”

엄청난 자기소개였다. 이들은 자신을 코다라고, 부모가 농인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존감’의 확연한 차이였다. 어딜 가나 장애인 접근권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는 공공기관을 비롯해, 연극을 보더라도 수어 통역을 신청하고 제공받을 수 있는 영국 사회, 그 안에서 자란 코다들의 정체성과 자존감 말이다. 농문화와 청문화 사이를 오가며 자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한국 내의 또 다른 다문화 코다. 그들이 스스로를 코다라고 명명할 수 있으려면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어쩌면 곧 방문할 영국에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짐을 챙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35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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