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나는_낙태했다

2016/10/22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나는 낙태를 했다. 나의 어머니 또한 낙태를 했다. 나의 할머니 또한 낙태를 했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지우라고 한 아이였다. 첫째였는데 여자아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태어난 1990년에는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으로 남아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116.8명에 이르렀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며 순전히 당신의 결정으로 나를 낳았다. 나의 위아래로, 그리고 동생의 아래로 세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다 자란 나에게 자신의 낙태 경험을 이야기하기까지, 엄마에게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 역시 멀쩡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딸도 낳고 아들도 낳았지만 아들 둘 모두 청력을 잃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다. 아들을 낳았지만 장애아는 ‘남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한 번 더 딸을 낳았던 그때, 할머니는 아이를 안고 산을 올랐다. 그 후로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몇 년 전, 나도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심장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축하한다며 이제부터 포토북을 만들겠다고 가격을 알려주었다. 내가 눈물을 터뜨리며 계획이 없다고 입을 열자, 그는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악몽에 시달리다 찾아간 다른 병원에서는 다짜고짜 약을 줬다. 내가 수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하자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병원을 알아보았다. 낙태는 불법이기 때문에 정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겨우 찾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는 몇십만원의 수술비를 현금으로 내야 한다고 했다. 영양제는 옵션인데 이후 임신 계획이 있다면 권장한다고 했다. 돈이 별로 없었다. 비참했다. 수술대에 누웠고 손과 다리가 묶였다. 차가운 수술 도구가 몸에 닿았다. 끔찍했다. 얼마 후,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회복실에 누웠는데 그곳 역시 너무 추워 벌벌 떨었다. 마취가 풀리자마자 그곳을 나왔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어 버스에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이 없어 약을 타오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의 연속이었다. 체력은 급속히 떨어졌고 무수히 많은 악몽을 꾸었다. 이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대다수 여성이 낙태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엄마가 그랬듯, 할머니가 그랬듯. 그런데 이것은 왜 ‘말’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 낙태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고 비싼 수술비를 모으고 이후 수술이 잘되었는지도 모른 채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왜 전부 음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불법 낙태 수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한 정부의 입법예고안과 현재의 ‘낙태죄’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인가? 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가? 가장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정부가 아닌 ‘나’다. 그 누구도 나의 비참함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입을 틀어막고, 나의 자궁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6761.html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