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당신을 이어 말한다

2018/03/0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밤낮으로 괴로웠다. 연이어 쏟아지는 ‘#MeToo’(미투) 폭로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네덜란드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한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에 가 있었다.

나 역시 날 선 언어로 말하겠다. 이것들을 꺼내놓는 데에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 영어 선생님이 기간제로 부임했다. 그는 팝송 가사를 프린트해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팝송을 따라 불렀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뻗었다. “보라는 어쩜 이렇게 허리가 잘록할까.” 그의 손이 나의 허리에 닿았다. 아직도 그 기분 나쁜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다리를 만졌다며 변태라고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예뻐해서 그랬다고, 쟤네들은 매일 불평만 한다고 생각했다. 열두살이었다.

여중을 다닐 때였다. 학교에 바바리맨이 출몰했다.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담벼락에 누워 성기를 노출하고 있는 그에게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뒤늦게 달려온 선생님이 어서 교실로 돌아가라며 바바리맨이 아닌, 우리를 야단쳤다. 선생님은 납치와 인신매매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며 짧은 치마를 입지 말고 남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 그대로 ‘처신을 잘하라’고 했다. 열네살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인도를 여행하던 때였다. 배를 타고 호수를 둘러보는데 비가 내려 꽤 추웠다. 나는 배의 뒤쪽에 사공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해준다며 내 허벅지를 만졌다. 배에는 어른들도 타고 있었다. 그는 허벅지 안쪽까지 더듬고는 볼에 입을 맞추고 귀에 바람을 불었다. 그제야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황급히 배에서 내려 울었다.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줄 알았다. 이후 경찰서에서 대신 진술을 했던 남성 어른은 나중에 술에 취해 이렇게 말했다. “너 그때 나 없었으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열다섯살이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던 때였다. 여성 혼자서 어떻게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해가 지면 나가지 않고요. 인도에서는 어깨와 무릎 노출이 굉장히 심한 노출로 분류되는데 그렇게 차려입지 않았어요.” 나 자신을 반성한다. 열여덟살이었다.

어느 영화제의 관객 숙소에서 몰카를 당했을 때였다. 공동 샤워실에서 씻고 있는데 창문이 열리면서 휴대폰을 든 팔이 쑥 들어왔다. 경찰서에 가 진술을 하니 “몰카를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어떻게 아냐”고 경찰이 물었다. 영화제 쪽은 시기적절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에스엔에스(SNS)에 정황을 올리니 수많은 매체에서 “여감독, 모 영화제 숙소에서 몰카 당해”라는 포르노성 제목으로 기사들을 찍어냈다. 나의 프로필 사진도 함께였다. 그 아래 ‘얼굴 봐라 꼴리지도 않게 생겼네’ ‘소라넷에 가면 있겠네’ 등의 2차 가해 댓글이 넘쳤다. 항의전화를 걸었던 한 매체의 기자는 “공인이시고 저희는 알 권리가 있죠. 기자회견 하셨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다. 고소하려고 경찰서에 가니 “네이버에 이름 뜨네. 고소해봤자예요. 매체는 보도할 권리가 있고 국민은 공인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요”라고 했다. 공인이 아닌, 스물여섯살이었다.

나는 말한다. 나 역시 방관했고 침묵했고 2차 가해를 했다. 나는 내 앞에 서서 먼저 말했던 당신들의 용기로 이어 말한다. 나 역시 방관당했고 침묵당했고 가해당했다.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44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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