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남북의 손말·수어

19/03/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베를린에 다녀왔다. 농인 디자이너이자 활동가 조혜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덴마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거처를 옮겨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북한 농인을 돕는 단체 ‘투게더 함흥’과 한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가 추진하는 손말수어 프로젝트다. ‘손말’은 수화언어를 뜻하는 북한 말이고 ‘수어’는 수화언어의 줄임말인 남한 말이다. ‘손말수어’는 말 그대로 ‘손말·수어를 통한 남북의 연결과 이해, 화합’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다.

북한과 남한의 수어는 다르다. 분단 이후, 남북한의 음성언어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왔듯 농인의 언어인 수어 역시 다르게 변해왔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통역사 없이 소통할 수 있었지만, 북한과 남한의 농인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통역사가 필요하다. 음성언어 사용자들은 남북의 언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여러 방법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농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두 언어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소통이 어려운 정도가 된 것이다. 비록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긴 했지만,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정작 남북의 농인은 통일이 되어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가볍게 안부를 묻기도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회사를 다니며 생계를 이어왔던 혜미씨는 한국에서 ‘청각 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걸 깨닫고 덴마크로 유학을 떠났다. 국제 수어를 배워 전세계 농인들을 만났다. 한반도를 벗어나 이렇게 많은 농인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자 혁명이었다.

“20대 초반에 돈이 없어서 치어리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어떤 노숙자 한 분이 귀가 안 들리냐고 묻는 거예요. 너무 불쌍하다고, 안 들리는데 어떻게 그 일을 하냐며 주머니에서 빳빳한 돈을 꺼내 주더라고요. 30만원이었어요.”

냉큼 그 돈을 받았다며 그녀는 웃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혜미씨는 졸업 후, 한국이 아닌 독일로 향했다. 북한 농인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음을 깨닫고 ‘투게더 함흥’과 함께 남한 수어와 북한 손말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시작했다.

남북한의 수어를 소개하는 영상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다섯편이 만들어진 이 영상에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첫번째로 화자는 국제 수어를 사용한다. 화면분할을 통해 남한의 수어와 북한의 손말이 비교되어 제시된다. 자막은 영어와 한글 문자언어로 제공된다. 이 짧은 영상에 무려 다섯개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언어들 사이를 가볍게 넘나들며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농인들은 자신의 수어를 기반으로 다른 수어를 빠르게 습득하는데 이는 청인이 다른 음성언어를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빠르다.

오른손 바닥으로 주먹을 쥔 왼팔을 쓸어내린 후, 두 주먹을 쥐고 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하여 가슴 앞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은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수어다. 다행인 건 북한의 손말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북의 농인들은 청인들보다 빠르게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여 소통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해체하고 있는 분단의 긴장, 또 다른 방식의 연대. 그것을 기반으로 찬란하게 꽃피울 농문화와 손말·수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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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몸의 기억

19/02/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친구 둘이 놀러 왔다. 한명은 5개월간의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곧 1년이 되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고 했다.

“한국 식당에서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보통 받는 시급보다 조금 덜 받아요. 그런데 그냥 여기서 평생 설거지만 하며 살아도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행복할 것 같아요.”

곧 돌아가는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살 빼려고 다이어트했었는데 그때 좀 우울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다들 내 외모에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내가 뭘 입든 어떻게 생겼건 말이에요.”

그녀는 우리 집에 한번 와본 적이 있었다. 내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사이 한국에서 단기간 유럽여행을 온 친구와 여기서 며칠 지냈던 것이다. 그녀는 네덜란드 특유의 큰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창문 블라인드 좀 무섭지 않아요? 그때 한국에서 온 친구가 이 사이로 누가 쳐다볼까 봐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어, 아니요. 거의 다 가려지잖아요. 뭐, 살짝 보이기도 하는데 다 열어놓고 있어도 아무도 안 쳐다봐요.”

대답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아차, 싶었다. 불과 1년 반 전, 네덜란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 역시 그랬던 것이다. 이곳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젠더중립화장실에 남성들과 함께 들어갈 때마다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몰래카메라가 있을까 봐 두리번거렸다. 집마다 있는 큰 창문은 흐린 날씨가 계속되는 이곳에서 조금의 햇빛이라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크기가 너무 커 누군가 망원경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줬다. 블라인드를 내리면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우울했지만 누가 내 몸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것도 불안해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혹시 쳐다보지는 않을까 먼저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집들은 늘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집 안을 쳐다보고 구경하지 않았다. 큰 창으로 내부가 훤히 보여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 그리고 그 개인 공간을 존중하는 것. 그게 네덜란드의 문화였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다가 차와 부딪힐 뻔한 적이 있었다. 운전자를 확인했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가 문을 박차고 나와 쌍욕을 할 거라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졌다. 그렇게 몇초가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전자는 개의치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몸은 한국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 가까이 오면 몸을 움츠린다. 남성인 경우 더더욱 그렇다. 그가 팔을 뻗어 나를 만질 수도, 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걸음을 멈추거나 빨리 걸어 안전한 거리를 만든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후 깨닫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이곳에서 살았던 1년 반, 내 몸이 두려워하는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음을 상기한다. 나의 몸은 막 이곳에 도착한 그녀들의 몸에 비하면 긴장이 많이 풀린 편이지만 여기서 나고 자란 이들의 몸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몸의 기억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각도만 조절하던 블라인드를 전부 올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지만 무엇보다 누군가 나를 훔쳐보지 않을 거라는 걸 배워서다. 나의 몸은, 몸의 기억은 그렇게 천천히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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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다음 영화, 찍을 수 있을까?

19/01/0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지난해 10월에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여성 감독과 여성 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를 소개하는 와이드앵글 섹션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는 한국 여성 감독 세 명의 작업이 소개되었고, 극영화 섹션 역시 여성 감독의 영화가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영화제 기간에는 ‘새로운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의 등장’이라는 이름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신진 감독들의 대담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성 감독과 안보영 프로듀서가 함께한 이 토크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은 지속가능한 제작 구조에 대한 고민이었다. 여성으로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첫 장편영화를 나와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영화는 왜 ‘여성이 만든 사적인 영화’로 불리며 작고 사소한 것으로만 여겨지는지, 왜 ‘여성 감독’의 작업은 ‘여성 영화’라는 이름으로만 분류되고 더 이상 논의되지 않는 것인지, 왜 이런 종류의 대담 자리에서 여성 감독은 늘 ‘새롭게 등장’하기만 하고 더 깊은 담론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들의 영화는 ‘여성 영화’ ‘사적 영화’로 단순히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생과 엄마의 이야기를 전 과학 영재이자 감독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윤주 감독의 <디어 마이 지니어스>, 감독 자신과 엄마, 외할머니로 이어지는 기억의 파편들을 통해 가족사의 단면을 돌아보는 명소희 감독의 <방문>, 1980년대 소규모 건설업을 통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지만 아이엠에프 외환위기 이후 투자 실패로 거품처럼 사라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마민지 감독의 <버블 패밀리>, 장애가 있는 행위예술가 친구를 기록하며 마주하게 되는 감독 자신의 마음에 대한 한혜성 감독의 <내가 모른 척 한 것>,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다룬 <기억의 전쟁>(감독 이길보라)까지. 경제성장과 개발에만 초점을 맞춰왔던 경쟁 중심 사회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을 여성 감독들이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이 과연 관객을 만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영화 <버블 패밀리>가 지난 12월 개봉했다. 2017년 이비에스(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업이지만 상영관이 별로 없다. 대기업이 투자하고 만들고 배급하는 영화만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걸리는 상황에서 이런 독립영화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어쩌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잡더라도 아주 이른 새벽 상영이거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차가 끊겨 있을 정도의 늦은 밤 상영 회차만 내준다. 전국의 예술·독립영화 전용관은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고 있고 그 수도 많지 않다. 그건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5년에 개봉한 나의 첫 장편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여성 신진 감독의 약진이 돋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국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한국 여성 감독의 작업이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관객을 만나야 하는 것일까? 이를 악물고 영화를 완성해도 상영을 할 수 없는 시스템에서 어떻게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두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우리, 여성 제작자만의 고민이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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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열린 질문

2018/12/0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의 세번째 학기를 여는 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온통 한국에 있는데 현재 네덜란드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나는 어떻게 나의 연구를 해나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의 매 학기는 의견을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하여 의견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를 통한 예술적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건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연구자, 멘토, 교수, 조교들이 한팀이 되어 그 과정을 돌아보는 것에 있다. 그건 단순히 연구자의 발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발표자와 의견을 주는 사람, 그것을 듣고 있는 모든 그룹 구성원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나의 질문에 한 교수가 물었다.

“‘한국’이 뭐죠? 한국 영토 안에 있는 것만 한국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디아스포라는요? 저는 이스라엘인인데 유럽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작업을 할 수 없는 걸까요?”

어렸을 때 파리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작업을 해온 영화감독 에얄이었다. 학장이 손을 들었다.

“지금 보라가 가지고 있는 건 한국과의 물리적인 거리인데, 그걸 더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한국에서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 하지 못했던 것들, 사실 그걸 하려고 지금 이 시기에 여기로 유학 온 것 아닌가요?”

아차,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막상 연구에 진척이 없어 속상하던 터였다. 학기를 시작하는 가장 첫 일정인 ‘피드백 세션’은 그룹의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통해 나의 연구에 대한 긍정적 가능성들을 던져줬다.

그리고 어제, 학기 말의 최종 발표를 앞두고 이제까지 해왔던 연구와 작업을 돌아보는 피드백 세션이 있었다. 모든 연구자는 각자의 질문을 준비해야 하고, 석사과정의 모든 구성원은 필수로 참가해야 한다. 학장과 조교도 피할 수 없다.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상황을 공유하고, 현재 당면한 질문을 던지면 구성원들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무엇이 좋았는지 돌아가며 얘기한다. ‘긍정적 피드백’이라 부르는 피드백 방법 중 하나다. 다음은 관점을 이용해 의견을 줄 차례다. 가령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이것이 더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양이의 관점이 될 수도 있고, 외계인의 입장에 설 수도 있다. 단순히 ‘나’가 주는 의견뿐 아니라 영화 프로듀서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지, 기자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등에 대한 관점에 따른 의견을 들을 수 있다.

다음은 ‘열린 질문’이 있다. 닫힌 질문은 어떤 방향으로 답을 안내하는 폐쇄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구성원들은 가능성을 여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령 학장이 내게 한 질문이 그렇다. ‘한국과의 그 물리적 거리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이용할 수 있을까?’

다른 피드백 방법으로는 개념을 통한 반영, 소문, 정보 혹은 속임수, 사적 편지 등이 있다. 연구자는 자신에게 맞는 피드백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한다.

어제의 내 질문은 이것이었다. 기획 중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나는 꼭 한국에 가야만 하는가. 학장은 물었다.

“그건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닫힌 질문이죠. 열린 질문을 해보겠어요?”

나는 고민하다 대답했다.

“한국에 가지 않고 이 작업을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까?”

말을 끝내자마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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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

2018/11/1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동생이 사는 서울 집에 다녀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인 커다란 비닐봉지로 포장된, 마치 선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무엇인고? 탐색을 시작했다. 반짝이는 투명 플라스틱 비닐봉지의 밀봉된 부분을 조심스레 열었다. 에어캡으로 최소 두겹은 돌돌 말아 포장한 것 같은 무언가가 잡혔다. 손으로 두세번 돌려 걷어냈다. 그러자 불투명하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다른 비닐봉지가 나왔다. 손을 갖다 댔다. 그제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나나였다! 세상에, 무슨 바나나를 이렇게 포장해서 판대? 깜짝 놀라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저 바나나, 네가 산 거야?” 하마터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잔소리를 하는 못된 누나가 될 뻔했다. 직장에서 직원 복지차 과일을 정기적으로 배송해주는데 벌레가 꼬일 수 있어 저렇게 과도하게 포장을 하여 택배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바나나도 맛있었고 내 동생 잘 챙겨주는 회사의 복지도 훌륭했지만 그 바나나 한송이 먹겠다고 이렇게 많은 비닐을 사용하다니.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유학하는 동안 비닐류는 재활용 쓰레기로 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비닐을 버리기 위해 비닐로 된 새 종량제 봉투를 열었다. 비닐이 비닐로 가득 찼다. 헛웃음이 났다.

그건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들른 일본에서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띵동, 하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음식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과도했다. 무언가를 살 때마다 친절하게 챙겨주는 비닐봉지,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과 포크, 나무젓가락, 심지어 이쑤시개와 물티슈까지. 엄청난 쓰레기들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조용히 만들어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했다. 네덜란드에서 살기 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지였다. 외식을 하는 것보다는 간단하게 장을 봐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끼니를 해먹는다. 외식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네덜란드 특유의 사회 전반적으로 검소한 분위기가 큰 몫을 한다. 이곳에서 처음 장을 볼 때는 늘 그랬던 것처럼 비닐봉지를 마구 썼다. 감자와 양파를 담을 때도, 사과 두알을 살 때도 그랬다. 그런데 같이 장을 보는 동기들은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에는 오이를 들고 계산대에 섰다. 미리 챙겨 온 에코백도 함께였다. 내 감자 깨끗하게 가져가겠다고 덥석 가져다 쓴 비닐봉지가 무색했다. 그때부터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장바구니를 늘 들고 다니고 과일과 채소를 담을 때도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종이상자에 담긴 낱개로 포장되지 않은 생리대, 종이컵 대신 집에서 쓰지 않는 머그잔을 기부받아 컵으로 사용하는 학교 카페테리아,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선택할 때 큰 가격 차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100% 친환경 에너지 회사 등.

2019년부터 네덜란드 정부는 에너지세를 대폭 올릴 예정이다. 세금을 올리면 사람들이 에너지를 좀더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폭이 꽤 크다. 한가구당 연 26만원 정도가 오른다. 정부는 이 세금으로 풍력 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를 지원한다고 한다. 돈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로 생산한 전기와 가스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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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기억의 전쟁

2018/10/1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총 세번의 상영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일반 관객의 반응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가족들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고모는 감옥에 있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태어난 합법적 진보정당을 드나들던 어느 여름이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고모가 잡혀가는 것을 보았다. 입술 대신 손과 표정으로 말하는 농인 부모는 고모가 왜 잡혀가는지 알지 못했다. 고모는 그런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엄마가 되었다. 반에서 1등을 하며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내게 인도 여행을 권했던 것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의 선택을 지지한 것도 고모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마주했다. 할머니는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학 나와 돈 벌고 잘 살 줄 알았더니 학생운동에 빠져 저렇게 힘들게 산다며 절대 고모처럼 살지 말라고 했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건 고모였다. 나는 그렇게 자라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고모는 지금도 노동당에서 부대표로 일하며 탈핵운동과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다.

고모는 18살의 딸을 데리고 왔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 때 나이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고모의 표정은 무거웠다. 참 무겁고 먹먹한 영화라고 했다.

나에게 베트남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귀하디귀한 텔레비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와 같은 나이, 8살이었던 나는 먼 곳에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국방색 캔과 미군 시레이션을 기다리며 동네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카스텔라를 자랑하곤 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베트남 참전으로 우리 집에 일본 산요 선풍기와 텔레비전이 생겼고, 엄마는 행상 대신 수출용 가발 비닐을 벗기는 일을 하며 살림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박정희 신화와 연결되어 점점 나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나는 학살 생존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전, 이 영화를 통해 그곳의 시간과 만났다. 나에겐 끊겼던 기억이 그곳에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길고 오래도록 아프고 고통스럽게.’

영화 말미에 민간인 학살로 동생들을 잃은 응우옌럽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말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 죽었으니까. 누가 그 일들을 책임질 수 있겠어.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책임져야 하나? 젊은 세대는 아무것도 몰라.”

고모는대신할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기억에 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가 가져온 카스텔라를 먹고 자란 고모,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 아직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고모의 18살 딸. 1968, 베트남 중부에서 있었던 학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답하며 불러내는 사람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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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1968년과 2018년 사이

2018/09/1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불과 몇주 전이지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영화 후반작업을 위해 방문했던 한국에서 시간을 쪼개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나갔다. 동료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행사 기록용 카메라를 잡았다. 마스크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에서 촬영을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꼭 기록해야 하는 현장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카메라를 들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못 살겠다, 박살 내자!”

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나도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어 촬영을 중단하고 피켓을 들었다. 구호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피해자다움 강요 말라, 가해자나 처벌하라!’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도로를 행진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내 옆에 서서 걷는 이들 대다수가 젊은 여성이었다. 분명 다른 집회 현장에서는 성별도, 나이도, 출신 성분도 모두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목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함께 집회에 나간 동생은남성이라는 이유로 돋보였다. 기자의 인터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상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폭력과 성차별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말이다.

자유 발언대의 마이크는 주로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잡았다. 훌륭했다. 이렇게어린 여자들이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욕설이 들렸다. 지나가던 택시였다. 승객으로 보이는 남성이 창문을 열고, 이 씨발년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회 내내 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열고 욕을 해댔다. 그렇게 많은 이가 모여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그랬다. 정말이지, 대단한 혐오였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자마자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매직 센터 암스테르담-1967~1970년 예술과 반체제전시장으로 들어섰다. 흑백 영상 두개가 나란히 재생됐다. 배에 두꺼운 매직으로 글씨를 쓴 여성들이 옷을 걷어 올리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었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거리에 있는 남성용 무료 화장실을 폐쇄하고 벽보를 붙이고 글씨를 썼다. 여성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늘 돈을 내고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데 남성에게만 이런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리의 남성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옷을 만지는 등 여성이 실제로 길거리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유쾌하게 미러링을 했다.

그렇다. 1970,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이 도시는 페미니스트, 히피, 동성애 인권활동가, 환경운동가, 무단점유자들의 안식처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이 베트남 전쟁 반대의 뜻을 알리기 위해 했던, 그 유명한베드 인평화 시위의 배경이 되었던 호텔도 바로 이곳에 있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를 거친 후,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동성혼을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곳에서,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린치하고 폭력을 가했던 곳에서 암스테르담은 비행기로 불과 11시간 남짓 떨어져 있다. 1968년과 2018, 그 사이를 우리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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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2172.html#csidxaa3f9cc921ab9a2aba6a707464f5fd8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2018/08/1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이번 칼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게이 프라이드의 한 장면에 대해 쓸 생각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축제는 행사 기간만 되면 무지개 색깔로 도시를 가득 채운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호텔은 동이 나고 온 동네는 축제 분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돋보였던 건 수어통역사였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근육질의 백댄서들이 춤을 추는데 시선은 통역사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공연의 한 요소 같았기 때문이다. 검은 바지에 하얀 반팔 셔츠, 나비넥타이에 귀여운 턱수염까지.

노래를 수어로 통역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한국 수어와는 달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현력이 풍부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무대와도 잘 어울리는 통역이었다. 가수가 무대에 나오자마자 그를 보고는이 사람 뭐지? 우리 공연팀 아닌데?” 하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대답 없이 통역을 했다. 전문적이기까지 했다. 가수는 이렇게 말했다.

게이 프라이드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죠. 저 손을 돌려 하는 박수 정말 멋지네요. 여기서는 우리 이렇게 박수 칩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사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손을 뻗어반짝이는 박수 소리갈채를 보냈다. 아주 많은 손이 반짝였다. 꿈같았다. 수어 통역이 소수의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공연 내내 사람들은 손바닥을 부딪치는 대신 손을 돌려 반짝이는 박수를 했다. 성소수자만의 축제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축제였다.

이튿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1년 만이었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온 터라 택시를 타야만 했다. 이윽고 후회했다. 여전했다. 남성 택시기사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짜증을 냈다. 유턴이 되는데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반대로 탔다며 내리라고 화를 냈다. 과격한 운전은 덤이었다. 멀미에 울상이 되어 집에 도착했더니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한테는 그런 일이 절대 안 일어나. 누나가 타면 진짜로 그래?”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처음으로 서울시청 광장이 꽉 찼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다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가 나왔다. 무죄란다. 5개월 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인터뷰를 이어가는 피해자의 영상을 봤다. 저 여자는 정말 벼랑 끝이구나, 이제 발 디딜 곳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으로 저렇게 위태롭게 서 있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했다. 그 용기 뒤로 수많은 여성이 다시 벼랑 위에 섰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에 한국은괴롭지만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진보하기는커녕 후퇴했다.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또다시자기들만의 리그인 것을 증명했고 여성, 아니 소수자를 위한 나라는 없음을 입증했다. 가해자가 진술을 바꾸고 증거를 인멸해도 무죄를 선고받는 나라. 얼마나 많은 이가 벼랑 끝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져만 하는 것일까.

818일 오후 5시에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가 열린다. 한국에 단 3주 머무르는 짧은 일정이지만 집회에 나갈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는 창문을 깨고 불을 질러요. 전쟁이 남자들이 들어주는 유일한 언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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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헷갈리니까 기다려요”

2018/07/21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멘토가 당일치기 하이킹을 제안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트레흐트 근교를 걷는 코스였다.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뉴홀랜드 해자를 따라 걸었다. 땅을 파 물이 들어오게 하는 방식으로 해자를 만들어 네덜란드를 거의 섬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어 체계였다고 한다. 85㎞에 이르는 이곳은 비행기 발명 이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해자 안의 성곽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철도를 놓기 위한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멘토는 설명했다.

물을 따라 걷는 풍경은 참으로 네덜란드다웠다.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목장에는 소와 말,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걷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동기들과 시골길을 걸으며 학교 강의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성곽 아래 위치한 아담한 카페에서 걸음을 멈췄다.

날이 좋아 우리처럼 하이킹을 나온 사람들이 야외 테라스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종업원이 네덜란드어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 메뉴판 있고요. 마실 거 먼저 드릴까요? 메뉴 설명을 먼저 해드릴게요.”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저 네덜란드어를 못하는데 혹시 영어로 주문 가능할까요?”

그러자 그녀는 바로 언어를 바꾸어 영어로 메뉴 설명을 했다.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정확한 영어 표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라스와 카페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녀를 포함한 이 카페의 모든 종업원이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 어떤 누구도 나처럼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주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주문한 오렌지 주스와 염소 치즈 샌드위치는 매우 훌륭했다.

점심 식사 후, 멘토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아까 우리의 주문을 받았던 그녀는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한 번에 다 못 외우니까 이 주문 받고 나서 그쪽 테이블로 갈게요.”

그러자 야외 테라스에 있던 모두가 웃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멘토는 머쓱했는지 하하 웃으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이 공간은 2015년부터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데 정신적 혹은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난민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놀라웠다. 암스테르담 도시에서 어떻게 알고 찾아간 것도 아닌, 하이킹 코스 도중에 우연히 이런 공간을 만날 수 있다니!

잠시 후, 그녀는 다른 테이블에서 받았던 주문을 처리하고 우리 테이블로 유유히 다가왔다.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주문을 받는 그녀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 그것이 특별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걷는 도중 만날 수 있는 어떤 한 카페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너무나 대단했다.

하이킹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니 유독 손으로 타는 자전거들이 많이 보였다. 하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타는, 손으로 페달을 돌리는 자전거였다. 전동 휠체어 역시 빠지지 않았다. 두세명의 아이는 넉넉히 싣고 달릴 수 있는 카고 바이크(큰 짐을 싣는 자전거)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는 그 사이로 나의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느긋이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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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푸시 펜던트와 노브라

2018/06/2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한국에서 온 지인과 암스테르담 시내를 걷는 중이었다. 대로변 집 창문에 걸린 분홍색의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푸시 펜던트’(Pussy pendant)였다. 말 그대로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한 목걸이들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어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 태연한 척하며 뒷걸음질쳤다. 창 너머로 네덜란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데니스 로젠붐이었다. 조금 민망한 마음에 엄지를 들어 눈인사를 했다. 이튿날 그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다.

‘푸시 펜던트’의 모양은 다양했다. 사람마다 성기 모양이 다르듯 피부 색깔과 크기에 따라 하나씩 손수 만든다고 했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색깔의 ‘고환 목걸이’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을 해왔던 데니스는 2년 전 친구들과 남아프리카의 한 축제에 가게 된 것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사실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죠. ‘돈’을 가져갈 수 없는 축제였는데 무엇으로 물물교환을 할까 생각하다 친구들이 예술가인 제가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처음에는 목걸이, 팔찌 등의 액세서리를 생각했죠. 그러다 ‘푸시 펜던트’가 생각난 거예요.”

 

데니스 로젠붐의 푸시 펜던트 www.deniserosenboom.com 제공
데니스 로젠붐의 푸시 펜던트 www.deniserosenboom.com 제공

 

그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것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실에서 한두 블록만 지나면 딜도는 물론이고 각양각색의 성인용품이 전시되어 있는 네덜란드 특유의 성인용품점 거리가 있었다. 성노동자들이 일하는 암스테르담 홍등가는 바로 지척이었다. 축제 이후 그는 전세계에서 엄청난 양의 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반응이 굉장히 다양해요. 대화하다 ‘혹시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거냐’고 묻기도 하고, 당황하거나 민망해하고 우스워하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요. 물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기분이 나쁘냐고요? 아뇨.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예술가로서 너무 흥미로워요. 대화를 촉발하고 일으킨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바로 예술이죠.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물어요. 왜 ‘푸시’냐고.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왜 안 되는데요?”

데니스는 저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성을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하나의 무언가로 단언할 수 없듯이 저마다의 독특함과 고유함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가 어떻게 가지각색의 목걸이들을 만들어왔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 제작 의뢰가 들어온다고 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은 이들이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내면 그 모양 그대로 목걸이를 만들어 배송한다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젠가 특강을 하러 갔는데 자신이 주문 제작을 받아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쳐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을 때라고 했다.

최근 한국에서 ‘불꽃페미액션’이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탈의 시위를 했다. 논란이 거셌다. 그러나 그건 그냥 ‘몸’이다. 오래전부터 ‘노브라’ 생활을 해왔던 내게 사람들은 왜 젖꼭지를 드러내고 다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남동생의 젖꼭지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노브라에 푸시 펜던트, 젖꼭지가 훤히 드러나는 딱 붙는 스웨터에 하이힐을 신은 채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아무렇지 않은 이곳 네덜란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곳일까? 데니스의 말처럼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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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0262.html#csidx9cd4336aa95f74eb1094b6031cff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