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

2018/11/1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동생이 사는 서울 집에 다녀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인 커다란 비닐봉지로 포장된, 마치 선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무엇인고? 탐색을 시작했다. 반짝이는 투명 플라스틱 비닐봉지의 밀봉된 부분을 조심스레 열었다. 에어캡으로 최소 두겹은 돌돌 말아 포장한 것 같은 무언가가 잡혔다. 손으로 두세번 돌려 걷어냈다. 그러자 불투명하고 말랑말랑한 재질의 다른 비닐봉지가 나왔다. 손을 갖다 댔다. 그제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나나였다! 세상에, 무슨 바나나를 이렇게 포장해서 판대? 깜짝 놀라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저 바나나, 네가 산 거야?” 하마터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잔소리를 하는 못된 누나가 될 뻔했다. 직장에서 직원 복지차 과일을 정기적으로 배송해주는데 벌레가 꼬일 수 있어 저렇게 과도하게 포장을 하여 택배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바나나도 맛있었고 내 동생 잘 챙겨주는 회사의 복지도 훌륭했지만 그 바나나 한송이 먹겠다고 이렇게 많은 비닐을 사용하다니.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유학하는 동안 비닐류는 재활용 쓰레기로 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비닐을 버리기 위해 비닐로 된 새 종량제 봉투를 열었다. 비닐이 비닐로 가득 찼다. 헛웃음이 났다.

그건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들른 일본에서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띵동, 하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수많은 음식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과도했다. 무언가를 살 때마다 친절하게 챙겨주는 비닐봉지,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과 포크, 나무젓가락, 심지어 이쑤시개와 물티슈까지. 엄청난 쓰레기들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조용히 만들어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했다. 네덜란드에서 살기 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지였다. 외식을 하는 것보다는 간단하게 장을 봐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끼니를 해먹는다. 외식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네덜란드 특유의 사회 전반적으로 검소한 분위기가 큰 몫을 한다. 이곳에서 처음 장을 볼 때는 늘 그랬던 것처럼 비닐봉지를 마구 썼다. 감자와 양파를 담을 때도, 사과 두알을 살 때도 그랬다. 그런데 같이 장을 보는 동기들은 한 손에는 사과, 다른 손에는 오이를 들고 계산대에 섰다. 미리 챙겨 온 에코백도 함께였다. 내 감자 깨끗하게 가져가겠다고 덥석 가져다 쓴 비닐봉지가 무색했다. 그때부터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장바구니를 늘 들고 다니고 과일과 채소를 담을 때도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 종이상자에 담긴 낱개로 포장되지 않은 생리대, 종이컵 대신 집에서 쓰지 않는 머그잔을 기부받아 컵으로 사용하는 학교 카페테리아,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를 선택할 때 큰 가격 차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100% 친환경 에너지 회사 등.

2019년부터 네덜란드 정부는 에너지세를 대폭 올릴 예정이다. 세금을 올리면 사람들이 에너지를 좀더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폭이 꽤 크다. 한가구당 연 26만원 정도가 오른다. 정부는 이 세금으로 풍력 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를 지원한다고 한다. 돈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네덜란드의 바람이 만든 에너지로 생산한 전기와 가스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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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기억의 전쟁

2018/10/1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총 세번의 상영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일반 관객의 반응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가족들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고모는 감옥에 있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태어난 합법적 진보정당을 드나들던 어느 여름이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고모가 잡혀가는 것을 보았다. 입술 대신 손과 표정으로 말하는 농인 부모는 고모가 왜 잡혀가는지 알지 못했다. 고모는 그런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엄마가 되었다. 반에서 1등을 하며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내게 인도 여행을 권했던 것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의 선택을 지지한 것도 고모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마주했다. 할머니는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학 나와 돈 벌고 잘 살 줄 알았더니 학생운동에 빠져 저렇게 힘들게 산다며 절대 고모처럼 살지 말라고 했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건 고모였다. 나는 그렇게 자라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고모는 지금도 노동당에서 부대표로 일하며 탈핵운동과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다.

고모는 18살의 딸을 데리고 왔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 때 나이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고모의 표정은 무거웠다. 참 무겁고 먹먹한 영화라고 했다.

나에게 베트남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귀하디귀한 텔레비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와 같은 나이, 8살이었던 나는 먼 곳에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국방색 캔과 미군 시레이션을 기다리며 동네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카스텔라를 자랑하곤 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베트남 참전으로 우리 집에 일본 산요 선풍기와 텔레비전이 생겼고, 엄마는 행상 대신 수출용 가발 비닐을 벗기는 일을 하며 살림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박정희 신화와 연결되어 점점 나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나는 학살 생존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얼마 전, 이 영화를 통해 그곳의 시간과 만났다. 나에겐 끊겼던 기억이 그곳에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길고 오래도록 아프고 고통스럽게.’

영화 말미에 민간인 학살로 동생들을 잃은 응우옌럽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말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 죽었으니까. 누가 그 일들을 책임질 수 있겠어.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책임져야 하나? 젊은 세대는 아무것도 몰라.”

고모는대신할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기억에 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베트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가 가져온 카스텔라를 먹고 자란 고모,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 아직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고모의 18살 딸. 1968, 베트남 중부에서 있었던 학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답하며 불러내는 사람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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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1968년과 2018년 사이

2018/09/1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불과 몇주 전이지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영화 후반작업을 위해 방문했던 한국에서 시간을 쪼개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나갔다. 동료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행사 기록용 카메라를 잡았다. 마스크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에서 촬영을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꼭 기록해야 하는 현장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카메라를 들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못 살겠다, 박살 내자!”

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나도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어 촬영을 중단하고 피켓을 들었다. 구호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피해자다움 강요 말라, 가해자나 처벌하라!’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도로를 행진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내 옆에 서서 걷는 이들 대다수가 젊은 여성이었다. 분명 다른 집회 현장에서는 성별도, 나이도, 출신 성분도 모두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목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함께 집회에 나간 동생은남성이라는 이유로 돋보였다. 기자의 인터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상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폭력과 성차별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말이다.

자유 발언대의 마이크는 주로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잡았다. 훌륭했다. 이렇게어린 여자들이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욕설이 들렸다. 지나가던 택시였다. 승객으로 보이는 남성이 창문을 열고, 이 씨발년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회 내내 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열고 욕을 해댔다. 그렇게 많은 이가 모여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그랬다. 정말이지, 대단한 혐오였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자마자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매직 센터 암스테르담-1967~1970년 예술과 반체제전시장으로 들어섰다. 흑백 영상 두개가 나란히 재생됐다. 배에 두꺼운 매직으로 글씨를 쓴 여성들이 옷을 걷어 올리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었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거리에 있는 남성용 무료 화장실을 폐쇄하고 벽보를 붙이고 글씨를 썼다. 여성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늘 돈을 내고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데 남성에게만 이런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리의 남성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옷을 만지는 등 여성이 실제로 길거리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유쾌하게 미러링을 했다.

그렇다. 1970,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이 도시는 페미니스트, 히피, 동성애 인권활동가, 환경운동가, 무단점유자들의 안식처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이 베트남 전쟁 반대의 뜻을 알리기 위해 했던, 그 유명한베드 인평화 시위의 배경이 되었던 호텔도 바로 이곳에 있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를 거친 후,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동성혼을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곳에서,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린치하고 폭력을 가했던 곳에서 암스테르담은 비행기로 불과 11시간 남짓 떨어져 있다. 1968년과 2018, 그 사이를 우리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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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2018/08/1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이번 칼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게이 프라이드의 한 장면에 대해 쓸 생각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축제는 행사 기간만 되면 무지개 색깔로 도시를 가득 채운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호텔은 동이 나고 온 동네는 축제 분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돋보였던 건 수어통역사였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근육질의 백댄서들이 춤을 추는데 시선은 통역사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공연의 한 요소 같았기 때문이다. 검은 바지에 하얀 반팔 셔츠, 나비넥타이에 귀여운 턱수염까지.

노래를 수어로 통역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한국 수어와는 달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현력이 풍부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무대와도 잘 어울리는 통역이었다. 가수가 무대에 나오자마자 그를 보고는이 사람 뭐지? 우리 공연팀 아닌데?” 하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대답 없이 통역을 했다. 전문적이기까지 했다. 가수는 이렇게 말했다.

게이 프라이드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죠. 저 손을 돌려 하는 박수 정말 멋지네요. 여기서는 우리 이렇게 박수 칩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사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손을 뻗어반짝이는 박수 소리갈채를 보냈다. 아주 많은 손이 반짝였다. 꿈같았다. 수어 통역이 소수의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공연 내내 사람들은 손바닥을 부딪치는 대신 손을 돌려 반짝이는 박수를 했다. 성소수자만의 축제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축제였다.

이튿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1년 만이었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온 터라 택시를 타야만 했다. 이윽고 후회했다. 여전했다. 남성 택시기사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짜증을 냈다. 유턴이 되는데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반대로 탔다며 내리라고 화를 냈다. 과격한 운전은 덤이었다. 멀미에 울상이 되어 집에 도착했더니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한테는 그런 일이 절대 안 일어나. 누나가 타면 진짜로 그래?”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처음으로 서울시청 광장이 꽉 찼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다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가 나왔다. 무죄란다. 5개월 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인터뷰를 이어가는 피해자의 영상을 봤다. 저 여자는 정말 벼랑 끝이구나, 이제 발 디딜 곳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으로 저렇게 위태롭게 서 있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했다. 그 용기 뒤로 수많은 여성이 다시 벼랑 위에 섰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에 한국은괴롭지만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진보하기는커녕 후퇴했다.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또다시자기들만의 리그인 것을 증명했고 여성, 아니 소수자를 위한 나라는 없음을 입증했다. 가해자가 진술을 바꾸고 증거를 인멸해도 무죄를 선고받는 나라. 얼마나 많은 이가 벼랑 끝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져만 하는 것일까.

818일 오후 5시에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가 열린다. 한국에 단 3주 머무르는 짧은 일정이지만 집회에 나갈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는 창문을 깨고 불을 질러요. 전쟁이 남자들이 들어주는 유일한 언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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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헷갈리니까 기다려요”

2018/07/21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멘토가 당일치기 하이킹을 제안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트레흐트 근교를 걷는 코스였다.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뉴홀랜드 해자를 따라 걸었다. 땅을 파 물이 들어오게 하는 방식으로 해자를 만들어 네덜란드를 거의 섬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어 체계였다고 한다. 85㎞에 이르는 이곳은 비행기 발명 이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해자 안의 성곽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철도를 놓기 위한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멘토는 설명했다.

물을 따라 걷는 풍경은 참으로 네덜란드다웠다.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목장에는 소와 말,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걷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동기들과 시골길을 걸으며 학교 강의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성곽 아래 위치한 아담한 카페에서 걸음을 멈췄다.

날이 좋아 우리처럼 하이킹을 나온 사람들이 야외 테라스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종업원이 네덜란드어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 메뉴판 있고요. 마실 거 먼저 드릴까요? 메뉴 설명을 먼저 해드릴게요.”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저 네덜란드어를 못하는데 혹시 영어로 주문 가능할까요?”

그러자 그녀는 바로 언어를 바꾸어 영어로 메뉴 설명을 했다. 약간 더듬거리긴 했지만 정확한 영어 표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라스와 카페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녀를 포함한 이 카페의 모든 종업원이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 어떤 누구도 나처럼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주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주문한 오렌지 주스와 염소 치즈 샌드위치는 매우 훌륭했다.

점심 식사 후, 멘토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아까 우리의 주문을 받았던 그녀는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한 번에 다 못 외우니까 이 주문 받고 나서 그쪽 테이블로 갈게요.”

그러자 야외 테라스에 있던 모두가 웃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멘토는 머쓱했는지 하하 웃으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이 공간은 2015년부터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데 정신적 혹은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난민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놀라웠다. 암스테르담 도시에서 어떻게 알고 찾아간 것도 아닌, 하이킹 코스 도중에 우연히 이런 공간을 만날 수 있다니!

잠시 후, 그녀는 다른 테이블에서 받았던 주문을 처리하고 우리 테이블로 유유히 다가왔다.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주문을 받는 그녀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 그것이 특별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걷는 도중 만날 수 있는 어떤 한 카페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 어쩐지 너무나 대단했다.

하이킹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니 유독 손으로 타는 자전거들이 많이 보였다. 하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타는, 손으로 페달을 돌리는 자전거였다. 전동 휠체어 역시 빠지지 않았다. 두세명의 아이는 넉넉히 싣고 달릴 수 있는 카고 바이크(큰 짐을 싣는 자전거)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는 그 사이로 나의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느긋이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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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푸시 펜던트와 노브라

2018/06/2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한국에서 온 지인과 암스테르담 시내를 걷는 중이었다. 대로변 집 창문에 걸린 분홍색의 무언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푸시 펜던트’(Pussy pendant)였다. 말 그대로 여성의 성기 모양을 한 목걸이들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어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 태연한 척하며 뒷걸음질쳤다. 창 너머로 네덜란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데니스 로젠붐이었다. 조금 민망한 마음에 엄지를 들어 눈인사를 했다. 이튿날 그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다.

‘푸시 펜던트’의 모양은 다양했다. 사람마다 성기 모양이 다르듯 피부 색깔과 크기에 따라 하나씩 손수 만든다고 했다.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색깔의 ‘고환 목걸이’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을 해왔던 데니스는 2년 전 친구들과 남아프리카의 한 축제에 가게 된 것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사실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죠. ‘돈’을 가져갈 수 없는 축제였는데 무엇으로 물물교환을 할까 생각하다 친구들이 예술가인 제가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처음에는 목걸이, 팔찌 등의 액세서리를 생각했죠. 그러다 ‘푸시 펜던트’가 생각난 거예요.”

 

데니스 로젠붐의 푸시 펜던트 www.deniserosenboom.com 제공
데니스 로젠붐의 푸시 펜던트 www.deniserosenboom.com 제공

 

그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것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실에서 한두 블록만 지나면 딜도는 물론이고 각양각색의 성인용품이 전시되어 있는 네덜란드 특유의 성인용품점 거리가 있었다. 성노동자들이 일하는 암스테르담 홍등가는 바로 지척이었다. 축제 이후 그는 전세계에서 엄청난 양의 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반응이 굉장히 다양해요. 대화하다 ‘혹시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거냐’고 묻기도 하고, 당황하거나 민망해하고 우스워하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요. 물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기분이 나쁘냐고요? 아뇨.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예술가로서 너무 흥미로워요. 대화를 촉발하고 일으킨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바로 예술이죠.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물어요. 왜 ‘푸시’냐고.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왜 안 되는데요?”

데니스는 저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성을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하나의 무언가로 단언할 수 없듯이 저마다의 독특함과 고유함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가 어떻게 가지각색의 목걸이들을 만들어왔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 제작 의뢰가 들어온다고 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은 이들이 성기 사진을 찍어 보내면 그 모양 그대로 목걸이를 만들어 배송한다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젠가 특강을 하러 갔는데 자신이 주문 제작을 받아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는 여성과 눈이 마주쳐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을 때라고 했다.

최근 한국에서 ‘불꽃페미액션’이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탈의 시위를 했다. 논란이 거셌다. 그러나 그건 그냥 ‘몸’이다. 오래전부터 ‘노브라’ 생활을 해왔던 내게 사람들은 왜 젖꼭지를 드러내고 다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남동생의 젖꼭지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노브라에 푸시 펜던트, 젖꼭지가 훤히 드러나는 딱 붙는 스웨터에 하이힐을 신은 채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아무렇지 않은 이곳 네덜란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곳일까? 데니스의 말처럼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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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삶의 창] 결과가 아닌 과정을 돌아보는

2018/05/2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9개월이 지났다. 이곳 석사 과정은 10명 남짓의 예술가들이 모여 그룹을 기반으로 영화를 통해 각자의 예술적 연구를 해나가는 것을 골자로 한다. 총 2년 과정에 주관성, 방법론, 실험, 개념화로 나뉜 네 학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2학기 발표를 앞두고 있는데 불과 지난주까지 이 학교에서 중요시하는 ‘예술적 연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1학기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생활에 적응하며 주관성을 찾느라 헤맸다. 이번 학기에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으려 애썼다.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왔고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학교 밖에서 여행하며 쌓았던 배움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었고 글을 썼어요. 최근에는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님과 그 아래서 자란 저의 이야기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고요. 이 두 프로젝트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새로운 접근·방법론을 찾고 싶어 여기 왔어요.”

그러자 지도 교수가 물었다.

“오래된 방법론을 버리고 싶다고 하는데 무엇이 오래된 것이고 새로운 것이죠? 오래된 것은 나쁜 건가요?”

교수들은 학기 내내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짚었고, 왜 새로운 것을 찾아야만 하는지 물었다. 무심결에 나는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은 그저 나의 경험에 기초한 사소한 것이며 전혀 예술적이 아니고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그럼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죠? 누가 예술가인가요? 보라씨가 한국 사회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해왔고, 여성이자 농인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의 시각으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예술 아닌가요?”

나는 어떤 주제에 접근할 때 내가 해왔던 방법을 바꾸고 싶고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은데 지난 9개월간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던데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왜 습관을 버리고 뜯어고쳐야 하나요? 관점을 바꿔 자신의 습관을 가지고 방향을 바꿔 접근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자신의 습관과 기존 방법론에는 분명 장점이 있어요. 그걸 취해서 다른 방법론을 만들어볼 수 있는 거죠.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장점을 버리려고 하죠?”

교수는 내가 해왔던 이전 작업을 잘 들여다보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들이 이미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되고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그건 ‘성과물’과 ‘결과물’이 되어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는 예술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했다. 사실 자신은 나의 결과물보다 과정에 더 흥미롭다고 했다.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 그는 나에게 그것이 ‘침묵’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나 침묵의 언어를 배우고 그 사이의 행간을 읽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어왔던 비장애 남성의 언어로 말해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작업해왔고 지속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침묵의 언어가 여태껏 기억의 중심에 서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읽어내고 시각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해나갈 예술적 연구일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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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631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2018/04/2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이 작은 나라가 겨울올림픽에 강한 줄 몰랐다. 막상 살아보니 이해가 가긴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렸을 때부터 매일같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볕 좋은 여름이 되면 풍덩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 겨울이 되어 암스테르담의 운하가 얼면 집에 있던 스케이트를 꺼내 도시 한가운데서 스케이팅을 즐기는 이들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덕분에 환경을 파괴하는 올림픽에 반대하는 나조차 평창 겨울올림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변에서 하도 “너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역사적인 순간을 놓쳐 아쉽지 않아?” 하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88 서울올림픽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게 올림픽은 너무나 먼 관심 분야였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북한 사람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때였다. 대한민국 국기 대신 한반도기가 펄럭였고 하얀색 패딩을 입은 선수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북한 삼지연 예술단의 강릉 공연이었다. 한국전쟁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며 평생을 한반도의 이념 전쟁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노래 ‘반갑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은 화면 하단을 향해 있었다. 자막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막은 뜨지 않았고 귀에 들리는 건 나의 모국어와 닮은 언어였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매일같이 보는 건 영어 자막이 있는 영상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상 또한 자막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자막 없이도 나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통일’은 어렸을 때 포스터·표어 대회와 글짓기 대회에서만 쓰던 단어였다.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김대중 정부 때 초등학교를 다니고 노무현 정부 때 중학생이었던 내게 ‘평화’는 이상하게도 아주 일상적인 단어였다. 학교에서는 우리가 아직 휴전 상태이고 그렇기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한테 편지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맘만 먹으면 비행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표어를 썼지만 동시에 북한은 빨갱이의 나라라고 배웠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통일이고 북한이었다.

언젠가 나의 스승이 이렇게 물었다. 1920년 서울역은 국제역이었다고. 서울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고.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되돌리는 것, 왜 안 되겠냐고. 나는 ‘에이, 설마’ 하고 코웃음을 쳤다. ‘통일’이라니. 이상한 단어였다.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지금도 충분히 평화로운데 왜?’ 하고 생각했던 내가 북한 예술단이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따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너무 신파적인 것 같아 울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났다. 난생처음 ‘통일’ ‘휴전’이라는 단어가 몸에 들어왔다. 사실 한번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상조차 금지된 구역. 어쩌면 내 생애 이곳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는 정말로 그 질문이 유효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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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2436.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2018/03/31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얼마 전 베트남에 다녀왔어요. 2014년 겨울에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기획을 시작한 이후 네번째 방문이었지요. 처음 베트남 중부에 도착했을 때는 ‘할아버지가 이곳 어딘가로 군함을 타고 도착했겠지’ 하며 당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베트남 중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런지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네요.

1971년 봄, 당신은 베트남 전쟁에 맹호부대 장교로 파병되었다고 했지요. 열여덟살이었던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자 당신은 베트남의 어느 도시를 가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호찌민부터 하노이까지 방문했던 도시를 쭉 열거하자, 당신은 그중 한 해안 도시를 짚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지요. 저는 그때 당신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구강암과 폐암이라고 했지요. 평소에 건강을 우선시했던 당신은 꽤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당신의 모습이 저는 좀 의아했어요. 당신은 제가 자라 베트남전에 대해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니, 사실 할머니는 “잘 모른다”고 했지요. 어렸을 적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은 기억하지만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이 왜 그곳에 갔는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둘이나 낳은 나랑 이혼하려고, 네 할아버지는 이혼비를 벌러 월남에 갔어”라고 할머니가 말하는 순간 저는 책에서 읽었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당신과 할머니의 이야기, 베트남 중부에서 학살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 저는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작업을 하는 내내 당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약 32만명의 한국군이 미국의 동맹군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그 전쟁 특수로 한국은 급속한 경제 도약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할아버지가 보낸 그 돈으로 할머니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살림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온몸이 굳었어요. 한국군에 의해 온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그 마을들의 ‘따이한’(한국) 제사에 다녀올 때마다 저의 뿌리와 이곳에서 있었던 학살의 기억이 겹쳐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밥 먹고 가라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먼저 손을 잡은 건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주머니였어요. 그녀가 내주는 밥은 베트남의 그 어떤 음식보다 따뜻하고 맛있었어요.

올해는 하미 마을과 퐁니·퐁넛 마을 학살 50주기였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는 제 손을 붙잡으며 말했어요. 사과받고 싶다고, 그 당시 가족들을 죽이고 온 마을을 불태웠던 한국군에게 직접 사죄받고 싶다고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보다 정확한 사죄, 무엇보다 당신으로부터의 사죄를 받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아니, 그녀가 해준 그 따뜻한 밥의 힘으로요.

할아버지, 곧 그 아주머니들이 한국을 방문해요. 4월21일부터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에서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서요. 월남 참전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이제는 당신이 대답할 차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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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465.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당신을 이어 말한다

2018/03/0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밤낮으로 괴로웠다. 연이어 쏟아지는 ‘#MeToo’(미투) 폭로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네덜란드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한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에 가 있었다.

나 역시 날 선 언어로 말하겠다. 이것들을 꺼내놓는 데에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 영어 선생님이 기간제로 부임했다. 그는 팝송 가사를 프린트해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팝송을 따라 불렀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뻗었다. “보라는 어쩜 이렇게 허리가 잘록할까.” 그의 손이 나의 허리에 닿았다. 아직도 그 기분 나쁜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다리를 만졌다며 변태라고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예뻐해서 그랬다고, 쟤네들은 매일 불평만 한다고 생각했다. 열두살이었다.

여중을 다닐 때였다. 학교에 바바리맨이 출몰했다.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담벼락에 누워 성기를 노출하고 있는 그에게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뒤늦게 달려온 선생님이 어서 교실로 돌아가라며 바바리맨이 아닌, 우리를 야단쳤다. 선생님은 납치와 인신매매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며 짧은 치마를 입지 말고 남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 그대로 ‘처신을 잘하라’고 했다. 열네살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인도를 여행하던 때였다. 배를 타고 호수를 둘러보는데 비가 내려 꽤 추웠다. 나는 배의 뒤쪽에 사공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해준다며 내 허벅지를 만졌다. 배에는 어른들도 타고 있었다. 그는 허벅지 안쪽까지 더듬고는 볼에 입을 맞추고 귀에 바람을 불었다. 그제야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황급히 배에서 내려 울었다.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줄 알았다. 이후 경찰서에서 대신 진술을 했던 남성 어른은 나중에 술에 취해 이렇게 말했다. “너 그때 나 없었으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열다섯살이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던 때였다. 여성 혼자서 어떻게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해가 지면 나가지 않고요. 인도에서는 어깨와 무릎 노출이 굉장히 심한 노출로 분류되는데 그렇게 차려입지 않았어요.” 나 자신을 반성한다. 열여덟살이었다.

어느 영화제의 관객 숙소에서 몰카를 당했을 때였다. 공동 샤워실에서 씻고 있는데 창문이 열리면서 휴대폰을 든 팔이 쑥 들어왔다. 경찰서에 가 진술을 하니 “몰카를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어떻게 아냐”고 경찰이 물었다. 영화제 쪽은 시기적절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에스엔에스(SNS)에 정황을 올리니 수많은 매체에서 “여감독, 모 영화제 숙소에서 몰카 당해”라는 포르노성 제목으로 기사들을 찍어냈다. 나의 프로필 사진도 함께였다. 그 아래 ‘얼굴 봐라 꼴리지도 않게 생겼네’ ‘소라넷에 가면 있겠네’ 등의 2차 가해 댓글이 넘쳤다. 항의전화를 걸었던 한 매체의 기자는 “공인이시고 저희는 알 권리가 있죠. 기자회견 하셨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다. 고소하려고 경찰서에 가니 “네이버에 이름 뜨네. 고소해봤자예요. 매체는 보도할 권리가 있고 국민은 공인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요”라고 했다. 공인이 아닌, 스물여섯살이었다.

나는 말한다. 나 역시 방관했고 침묵했고 2차 가해를 했다. 나는 내 앞에 서서 먼저 말했던 당신들의 용기로 이어 말한다. 나 역시 방관당했고 침묵당했고 가해당했다.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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