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네덜란드에서 자전거 타기

2017/01/27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며칠 전, 엄청난 강풍을 동반한 겨울 폭풍이 네덜란드를 강타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이착륙 예정이었던 항공편 268편이 결항하고 기차를 비롯한 버스, 트램 등의 교통편에 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알림을 받았다. 기상 경보는 가장 심각한 단계를 의미하는 ‘코드 레드’였다.

지난달, 폭설이 내렸을 때의 경보 단계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코드 오렌지’였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색이 오렌지색이기도 하고 ‘나는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한국에서 왔는데 뭐 폭설 정도야’ 하고 코웃음 치며 자전거를 끌고 나가서는 시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바 있어 이번에는 몸을 사리기로 했다. 물론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암스테르담의 운하와 시가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말로만 듣던 유럽의 겨울, 절경이었다.

그러나 프레임 바깥은 현실이었다. 눈은 자꾸만 내 눈 속으로 들어가 앞을 볼 수 없었고, 손은 꽁꽁 얼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는 자꾸만 미끄러져, 앞을 걸어가는 행인과 다른 자전거, 자동차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간 얼어 죽겠다 싶어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으려니 창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폭설이 내려도, 코드 오렌지 경보가 떨어져도 자전거는 타야만 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인구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은 나라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녀노소 불구하고 누구나 자전거를 탄다. 그건 코드 레드 경보가 내려도 마찬가지다.

대학원 과정 워크숍이 있어 학교에 가야 하는데 당일 아침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었다. 이제부터는 자연의 힘을 경외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것을 포기하고 트램 정거장으로 향했다. 운하를 지나는데 그곳이 바람 골이었는지 만화 속 한 장면처럼 그만 바람을 타고 날아갈 뻔했다. 트램에 올라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어 방송이 들렸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렸다. 강풍이 불어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 트램. 노 버스. 노 트레인. 오마이갓. 학교까지는 걸어서 4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혹시 다른 노선의 트램은 운행을 하나 싶어 근처 정류장에서 다른 트램을 탔다. 그러나 또다시 운행을 멈췄다. 실소를 하며 동기에게 전화하니 이제 곧 수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도대체 너희는 어떻게 학교를 갔느냐고 물으니 자전거를 탔다고 했다. 강풍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히고 자전거가 날아가는 판에 자전거를 탔다니! 이제부터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인들 역시 경외하기로 했다.

며칠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도심 한가운데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빨간색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네덜란드영화학교 대학원 과정 학장이었다. 학장이 나처럼 자전거를 탄다니! 문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당신 자전거를 타느냐’고 물으니 학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전거 타는데 왜? 네덜란드 총리도 자전거 타고 출퇴근해.”

작년쯤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정장 입고 자전거 출퇴근하는 총리’의 나라가 바로 이곳 네덜란드였던 것이다. 아,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손으로 페달을 돌려 타는, 장애인도 탈 수 있는 특수 자전거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렇다. 이곳은 자유와 관용의 자전거 나라인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9564.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2017/12/3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악몽을 꿨다. 중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꿈이었다. 며칠에 걸쳐 시험을 보는데, 수학과 과학 시험을 치르다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수학 과목의 경우 겨우 한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마킹을 했고, 과학은 빈 답안지를 내야 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 어서 한 문제라도 풀라며 시간을 더 주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문제를 풀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객관식 시험을 치르고, 1학년을 다니고 그만두었던 고등학교에 복학하는 꿈은 자주 꾸는 악몽 중 하나다. 야심 차게 학교를 자퇴했어도, 졸업한 지 십여년이 지났어도,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에서 지내고 있어도 그 꿈들은 여전히 나를 찾아온다.

네덜란드 영화 학교에서의 첫 학기가 끝났다. 기말 발표를 했고, 그에 따른 연구 자료들을 제출하고 면접을 봤다. 결과는 패스, 학점이 따로 없는 구조다. 정확하게는 통과와 미달을 구분하기 위한 점수가 있지만 그것은 연구원(이곳에서는 ‘학생’이라는 호칭을 선호하지 않는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사 과정은 열 명의 동기들과 세미나 방식의 워크숍들을 함께 하며 자신의 연구 주제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발전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자신만의 속도로 연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 점수를 매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워크숍이 끝나면 강사로부터 ‘학점’이 아닌 정성스러운 ‘피드백’ 메일을 받는다.

기말고사도 마찬가지다. 면접관들은 내가 제출한 자료와 발표를 들여다보고 그에 따른 의견과 질문을 준비한다. 우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관점에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언과 같은 질문들이다. 또한 면접은 혼자 보지 않는다. 나의 연구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켜봤던 멘토가 면접에 동행한다. 그는 내가 면접을 보는 동안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있다. 이후 내가 잠시 나가 있는 동안 나 대신 대답을 하거나 추가적으로 면접관의 조언을 듣는다.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것들을 옆에서 지켜 보고 그에 맞는 멘토링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구조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면접관은 사려 깊은 격려와 함께 첫 학기 통과 여부를 알려준다. 물론 나도 관련된 질문과 피드백을 할 수 있다. 미달하는 경우, 한번 더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몇주 후 기말고사와 관련된 피드백 메일을 받게 된다. 이것이 영화 학교에서 치른 첫 학기 시험이었다.

학부 시절을 되돌아보면 매일같이 캠퍼스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운 축에 속하는 예술 학교였고,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원칙으로 학점이 매겨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출석률’이었다. 학점을 매기기 위한 가장 객관적인 지표가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성적 장학금은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캠퍼스를 뛰어다녔다. 설령 그것이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건 자연스럽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되어 악몽과도 같이 남아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악몽을 덜 꾸기를 바란다. 대신 배움과 학습에 대한 즐거운 기억들이 자리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이들이 배움에 대한 설레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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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5614.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유연함의 사회

2017/12/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수업시간이 10시에서 10시30분으로 바뀌었다.

이곳 네덜란드 영화학교의 석사 과정은 열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중심으로 매번 새로운 워크숍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첫째 주에는 향후 2년간 함께 공부해나갈 그룹이 중요하니 연기 워크숍을 통해 서로의 몸과 움직임을 파악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는 누가 네덜란드 아니랄까봐 배에서 나흘간 생활하며 밥을 지어 먹고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질리도록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집중적인 세미나형 워크숍이 아침 열시부터 저녁 대여섯시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스케줄이었다.

학기 중반이었을까, 동기 중 두명이 전체 수업시간을 10시30분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유인즉슨, 로테르담과 델프트에서 학교가 위치한 암스테르담까지 오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데 교통비가 비싸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을 늦추면 출퇴근 시간 이후에 적용되는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럼 무료로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열명의 학생 중 두명의 생활비 절감을 위해 대학원 수업시간 전체를 바꾼다고? 생소하고 낯선 제안이라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보낸 후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조교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동의했고, 교강사들은 우리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수업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변경되었다. 흥미로웠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영화감독 오사마 무함마드의 특강이 있었다. 파리에 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 관한 영화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을 보여주었다. 1001명의 시리아인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폭탄으로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시멘트 먼지에 뒤덮인 고양이가 다리를 잃은 채 절뚝이며 걸었고,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은 말들이 거리에 누워 있었다. 건물 사이로 총에 맞아 쓰러진 주민을 구하기 위해 긴 철사를 거리로 던지는 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들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비닐봉지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학교의 주요 강사 중 한 명이었다. 이스라엘 출신인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꽤 유명한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우리 아빠 나이뻘 되는 남성인 그는 맛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미세한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는 작은 강의실이었다. 스크린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심지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몇몇 사람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수업시간에 도시락이나 과일을 먹는 것은 이 학교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으나 이 상황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은 그는 영화 상영 중간에 나갔고, 우리는 말도 없이 사라진 그의 행동을 의아해했다. 얼마 후, 그로부터 단체 메일이 왔다.

사과문.

모두에게. 지난 특강 중 내가 무언가를 시끄럽게 먹어 충격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영화 상영 중 제가 저질렀던 저속한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면 정중히 사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알려주십시오. 저는 여전히 배우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학교 건물은 밤 9시만 되면 ‘유연함 없이’ 문을 닫는다. 모두가 퇴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갇혀 밤을 지새워야 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그럼 이만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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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169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프로불편러의 서울

2017/11/04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인천공항에서였다.

올해 여름은 유별나게 더웠는데 그건 새로 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때문이기도 했다. 귀를 덮는 차폐식 헤드폰은 말 그대로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소리에 민감한 내가 서울이 너무 시끄럽다며 고통을 호소하자, 지인이 “서울을 조용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귀를 막아보는 건 어떠냐”며 소개해준 것이었다.

가격 때문에 반년을 고민했다. 구입하고 난 후에는 고민했던 지난 반년을 후회했다. 신세계였다. 헤드폰을 끼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면 주변 소음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 건강이 회복될 정도의 소음 차단이었다.

공항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줄을 섰다. 최근 몇년 전부터 줄을 서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는데, 마치 내게 말을 하는 듯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줄을 설 때면 더 심했다. ‘빨리빨리의 민족’은 누구보다 앞서가기 위해 앞사람과 몸을 밀착하며 줄을 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고, 무사히 그곳을 지나기 위해 귀를 막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선 사람들이 자꾸만 내 가방에 몸을 기댔다. 불편했다. 어차피 한줄 서기라 밀착하며 줄을 선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몇번이고 참을 인 자를 그렸다.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몸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발을 쿵쿵 굴러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정말 소리를 지르거나 저 사람들을 때릴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달해 이상행동을 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헤드폰을 벗고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런 거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요. 조금만 떨어져서 서주실 수 있을까요. 몸이 너무 붙어서요.”

이윽고 나는 인천공항 미친년이 되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떨어져서 줄을 서느냐며 사람이 서로서로 이해하고 살아야지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 헤드폰을 끼고 등을 돌렸다. 미처 차단되지 못한 분노와 화가 들려왔다.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해 “죄송한데 다 들린다”고 그만하시라고 하자, 두 모녀가 바통을 주고받으며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봤고, 나는 창피하고 억울했다. 혼자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 구역 미친년이 되어 아줌마랑 싸우고 싶은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사회에서 이만큼 불편하고, 그래서 자칫하다가는 당신을 때릴 것 같으니 이만큼만 양해해달라고 했던 건데 그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참담했다. 서울에서 살아갈 만큼 충분히 무뎌지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당분간은 여기서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빨개진 얼굴로 울음을 참았고, 두 모녀는 그곳을 빠져나가기까지 나를 노려봤다. 나는 출국 도장을 찍고 그곳을 나오자마자 엉엉 울었다.

나도 안다, 나 예민한 거. 엄마도 내게 “그렇게 예민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했다. 맞다. 그래서 못 살았다. 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민감하고 까칠한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한국이었으면 좋겠다. 나 같은 프로불편러 개인주의자들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한국 사회라면 정말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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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7396.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다양성의 공간

2017/09/3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올해 봄, 네덜란드 영화학교로부터 서류 심사에서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화상 채팅으로 면접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교 측은 “우리는 그룹이 중요하기 때문에 면접을 통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 면접장에 들어서니 키가 큰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나를 반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싶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학장이 물었다.

“여기 입학하게 되면 구성원에게 어떤 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해왔고, 여기서 어떤 걸 배우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어떤 걸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고심하다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온 여성으로서 다른 시각과 관점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열 명이 모였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동기들의 간략한 정보를 받았다. 이름과 국적, 간단한 이력이 쓰여 있었다. 여섯 명이 네덜란드인이었고, 나머지 네 명이 스페인, 덴마크, 스위스, 한국이었다. 생각보다 꽤 단조로운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중동과 동유럽 사이 어딘가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스테판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8살 때 미국으로 가 10년 정도를 살았다고 했다. 국적이 어떻게 되냐고 묻자, 그는 정말 이상한 질문이라고 하며 두 손과 어깨를 살짝 올렸다.

“부모님은 유고슬라비아 사람이고, 나는 여기서 태어났지만 10년 동안 미국에 있다 온 거라 모르는 게 더 많아. 동생은 멕시코에 살고, 아빠는 하와이에, 엄마는 곧 여기로 올 거야. 네덜란드 여권을 갖고 있긴 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 국적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건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18살 때 네덜란드로 온 야핏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네덜란드 국적을 갖고 있는 리나도 그랬다. 스위스인 어머니와 네덜란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말라이나, 스위스 남부의 이탈리아 국경 부근에서 자란 조지아까지. ‘국적’으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과 문화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나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의 것과 달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는 문장이 여기서는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냥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것’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사진을 찍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게 된 에얄 시반 감독은 워크숍을 진행하며 물었다. 누가, 무엇이 역사를 결정하는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이 논픽션인가. 그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 구분과 정의는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가.

나는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이 문화들의 레이어(층위) 속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한국에서 온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한 번 더 아시아의 관점을 주목하고, 덴마크에서 온 피터가 있기 때문에 북유럽과 네덜란드 사이의 지점을 고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룹’과 ‘구성원’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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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3196.html#csidx2d61c92c20c7df1b9c39faa6fbc9aae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모집 중

2017/09/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은행 계좌도 열었고 중고 자전거도 샀다. 어제는 네덜란드의 임대주택 회사에서 공급하는 방을 계약했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한국 시간으로 밤이 되면 자꾸 잠이 온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예술대학 소속인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석사 전공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2년간 여기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유학을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왜 암스테르담인지, 무슨 돈으로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작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쳤다. 암스테르담은 그중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고, 이방인에게 친절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영화학교의 인상이 매우 좋았다. 지도를 보다 보니 숙소 근처에 학교가 있었고, 유학을 고민하던 나는 무작정 학교를 방문했다. 학과장이 나의 대책 없는 방문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석사 과정에 대한 상담도 받았다. 그렇게 원서를 준비했고, 서류 심사에 합격해 면접을 봤다. 그들은 내게 왜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한국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다. 책 작업도 해보고, 영화를 만들어 배급하고 개봉하는 경험도 해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자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게 되었다. 다음 작업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무엇을 기반으로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작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이 생겨났다. 일단 네트워크의 확장과 더 넓은 경험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유럽의 작업자들은 어떻게 작업을 해나가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암스테르담은 일 년에 한 번씩 규모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면접을 무사히 마쳤고, 학과장에게 축하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학교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학비는 면제받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백방으로 국내외 장학금을 알아보았지만 예술, 심지어 순수예술도 아닌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국의 경우는 꽤 있었지만 대개 자국민을 위한 것이었다. 매일같이 장학금을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모두가 국내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했고, 정말로 그러했다. 떠나는 날이 다가왔고 결국 장학금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크라우드 펀딩을 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이길보라의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목적은 보라가 아르바이트를 덜 하고 책과 영화를 더 찾아보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 리워드는 없음. 대신 사회에 좋은 영화와 글로 환원하겠음. 그렇게 에스엔에스(SNS)를 통한 펀딩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 중 한 명이 전화를 했다. “너, 크라우드 뭐 한다며? 아니, 알바를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야지 무슨 후원을 받아, 후원을.”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씩씩거렸다. 나는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훔치는 것도 아니다. 빨갱이도 아니다. 다만 장학금과 생활비가 필요할 뿐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허리가 휘어지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 곳곳에는 학비가 없으며 심지어 외국인에게도 학비를 면제해주고 넉넉한 장학금을 주는 곳들이 있다. 한국의 상황이 그러하지 못하다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을 것이다. 그에게 분해서라도 더욱더 열심히 장학금을 모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공부도 유학도 꿈꿀 수 없는 세상은 불평등하다. 그리하여 나의 크라우드 펀딩은 아직도 절찬리에 모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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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9327.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부채감의 사회

2017/08/0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열아홉 살의 나는 다큐멘터리 피디(PD)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때 본 몇몇의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중 하나는 김일란 감독의 <3×FTM>이었다. 세 명의 에프티엠(FTM, Female To Male.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을 다루는 이 영화는 내 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FTM’이라는 글자를 노트에 적었다.

동성애는 죄라고 배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를 따라 교회를 다녔던 내게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그 자체로 ‘죄’였다.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남자였다’고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날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였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다른 이의 삶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 건지,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교회로 가 동성애가 왜 죄인지를 물었고, 교회와 불화했다. 오만가지 질문이 생겨났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현장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영상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가 좋았다. 그곳에서 그들이 쌓은 친밀감과 거리는 영화 속에 오롯이 드러났다. 나는 그들을 통해 내가 가지 못한 현장을 만날 수 있었고, 영화를 통해 어떤 이의 얼굴 표정과 찰나의 순간 같은 것들을 보고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고, 동료와 스승이 필요해 대학에 입학했다. 많은 사람과 좋은 영화를 만났지만, 그것만으로 다음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다. 제작비가 필요해 여러 곳에 제작 지원 신청을 하고, 피칭을 했다. 누군가는 “학생 영화인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 그냥 찍어”라고 했다. 무수하게 떨어지고 떨어진 끝에 촬영 장비와 교통비를 마련했다. 인건비는 거의 책정하지 못했다.

미안해하며 두 번째 영화를 찍었다. 세 번째 영화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에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때에도 단 몇 번 카메라를 들었을 뿐이었다. 마음속 깊숙이 부채감이 생겼다.

얼마 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고, 박근혜 퇴진 운동의 미디어팀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비보를 들었다. 세상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 <3×FTM>의 김일란 감독님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장애인운동 현장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곁을 지켰던 박종필 감독님은 간암 말기로 황망히 돌아가셨다. 그의 유언은 ‘미안하다’였다고 한다.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때 한 번이라도 현장에 더 나갈걸’ 하고 미안했고, 국가가 지키지 못한 것을 지키려다 자기가 부서지고 마는 이들에게 미안했다. 동시에 국가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왜 국가는, 시스템은 이들을 지키지 못하는가. 나는 이런 부채감을 계속해서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나/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지키지 못해 미안해하고 싶지 않다. 미안해해야 할 주체는 국가이자 시스템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영화를 계속 보고 싶고, 그들과 함께 차별에 저항하며 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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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5589.html#csidx4bbec1a6ea42c529e4ea5b07eb05e57

한겨레 칼럼 [삶의 창] 값싼 동정과 자존감 사이

2017/07/0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농인 부모의 아름다운 세상을 딸의 시선으로 담은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지난달 일본에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에 개봉을 했으니 2년 만에 관객을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의 자녀)인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 상영 외에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가령 관객과의 대화(GV)를 위해 주인공 농인 부부가 등장했을 때 영화관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지 고민해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어떤 관객은 극장에 갔더니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로 가득했는데 자신은 알 수 없는 그 언어 사이에 둘러싸여 ‘타자’가 되는 경험을 했다며 영화 외적으로도 생경한 체험이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그랬다. 현지 배급사는 농인 역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에 배리어 프리 자막을 삽입했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자막으로 영화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개봉 2주차에는 영화의 주인공인 부모님이 감독인 나와 함께 무대 인사를 했는데, 언어가 무려 네 가지였다. 일본 음성언어, 일본 수어, 한국 수어, 그리고 한국 음성언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절반은 일본 농인이었고, 절반은 일본 청인이었다. 영화 상영 후 무대인사 행사에는 네 명의 통역사와 장비들이 배치되었다. 무대 좌측에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회자가 있었고, 그것을 일본 수어로 통역하는 A가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엄마·아빠, 한국 수어와 한국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나, 일본 음성언어와 한국 음성언어를 통역하는 B가 나란히 섰다. 무대 뒤 스크린에서는 한국 수어를 읽어 일본 수어로 통역하는 C의 얼굴이 보였다. C는 무대의 수어를 볼 수 있도록 관객석 앞쪽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와 빔 프로젝터가 C의 수어를 실시간으로 촬영해 스크린에 투사했다. C 앞에는 일본 수어를 읽어 일본 음성언어로 통역하는 D가 앉아 있었다. 말로도, 글로도 설명하기 복잡한 시스템이었지만 훌륭한 세팅 덕분에 모두가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 관객들은 질문을 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와야만 했다. 관객석에 앉은 농인의 경우, 누군가 객석에 앉아 질문을 하면 누가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잘 말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상 보기 드문 광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질문을 했고, 네 가지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일본 농인들은 한국 농인의 삶이 그네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고, 일본과 한국의 수어가 비슷하여 놀랐다고 했다. 농인 부모와 영화를 보러 온 코다도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통역사로서의 역할, 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서로 다른 네 가지 문화 사이에서 수어는 미개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몸짓이 아닌 완전한 ‘언어’가 되었고 농문화는 온전한 ‘문화’가 되었다.

한국에서 영화를 상영했을 때, 혀를 쯧쯧 차며 나와 부모를 동정하던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저는 불쌍하지 않아요” “독립영화 많이 봐주세요” 하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농인 부모를 뒀다는 이유로, 독립영화를 한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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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92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같다 / 이길보라

2017/06/1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일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한국에 여행 온 그를 만났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가볍게 만나 커피 한잔 하려던 우리는 계획을 바꿔 밥을 먹었다. 그는 어쩌다 영화를 만들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덟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갔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 투”라고 했다. 그는 중학교 때 학교를 자퇴하고 음악을 하다, 미국으로 가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다. 흥미로웠다. 나는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그 역시 나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리턴 티켓이었다. 당장 이틀 후면 돌아가야 하는 당신을 두고 나는 이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고심했다. 우리는 다음날 다시 만나 데이트를 했고, 나는 동이 트자마자 비행기표를 사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가 사는 도쿄가 아닌 후쿠오카였다. 연휴를 맞아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그의 여정에 난데없이 사랑에 빠진 한국 여자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짐짓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타이밍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의 가족과 함께하는 유후인 온천 여행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해피 뉴 이어!” 나는 그의 가족들과 건배를 하며 새해를 맞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물세 살 때쯤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는 직업군인이었고 하루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내게 청혼을 했다. 나는 그가 좋았고, 그러자고 했다. 나는 부모에게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해 두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가 헤어지자고 했다.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모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이유를 물으니 “너의 부모가 장애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가 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에 대한 편견과 싸워 왔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관계를 그만두자고 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부모를 만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너와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이 태어날 확률이 높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최악이었다. 그러나 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그만두는 것은 신념에 맞지 않았다. 울고 또 울다 못해 악을 썼다. 그와 헤어지는 일은 그렇게도 어려웠다. 어느 날 엄마는 그와 왜 헤어졌는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지. 보라도 그렇고, 보라의 부모님도 그렇고.”

이야기를 들은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내게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마 전, 그의 어머니가 도쿄로 출장을 오셨다. 어머니는 요새 한국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일본 수어와 많이 비슷하다며 주먹을 쥐고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붙였다. “같다”라는 뜻의 한국 수어이자 일본 수어였다. 그의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한 순간,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디폴트값’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관계 맺음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데, 이거 하나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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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8196.html#csidxe2040b05035a8fea5cc5258c730330d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헬조선을 헬조선이라 부르다 / 이길보라

2017/05/1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지난달, 네덜란드의 영화학교 입학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눈이 파란 교수가 다음 프로젝트로 어떤 걸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헬조선과 미소지니”라고 답했다. 내가 당당하게 고유명사를 말하듯 ‘헬조선’이라고 하자, 교수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헬 뭐라고요?”(Sorry. Hell, what?)

나는 ‘헬’은 영어의 그 ‘헬’이고 ‘조선’은 한국에 있었던 왕조라며, 젊은 세대들이 왜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지 설명했다. 한국 경제의 급속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병폐가 수면 위로 하나둘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미소지니에 대해서는 한국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예를 몇개 들었다. 그들은 2017년 한국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왜 짧은 시간 동안 ‘헬조선’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몇년 전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지금의 한국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을, 유럽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호스텔은 대학(원)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내가 묵던 도미토리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에서 온 학생은 공부도 공부지만 더치(Dutch: 네덜란드인)와 연애하는 것이 무척 기대가 된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노르웨이 학생이 쉽지 않을걸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유럽에서는 바(Bar)에서도 낯선 이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다”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자 스페인에서 온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러면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데이트를 하느냐고 물었다. 같은 유럽이라도 저렇게 다르구나. 마치 ‘비정상회담’을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그들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국은?”

나는 한국에서는 호감 있는 이에게 번호를 묻는 일은 가능하지만, 스토킹 같은 일도 빈번하다고 했다. 남녀가 평등해 보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고, 2016년에 일어난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라고 했다. ‘몰카’가 어디에나 있고 맘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하자 모두들 놀란 눈치였다.

“경찰은 무엇을 하냐” “정부는 단속하지 않느냐” 질문이 쏟아졌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손이 떨렸다. 분명 이 대화는 아주 가벼운 연애 이야기로 시작한 것 같은데. 나는 왜 멀고 먼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에 와서 ‘헬조선’을 설명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못 살겠다 하면서 매번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곳에서도 한국의 뉴스를 들여다보며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왜 나의 몫인가. 어째서 부끄러움과 좌절은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자 목이 메었다.

누군가는 헬조선을 왜 자꾸 헬조선이라 부르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어도 이전과 같이 일상에서 혐오가 만연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나고 자란 이 사회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음으로 헬조선을 헬조선이라 불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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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522.html#csidx24b9ff4a0773149b11abc5b28aaf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