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결과가 아닌 과정을 돌아보는

2018/05/2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9개월이 지났다. 이곳 석사 과정은 10명 남짓의 예술가들이 모여 그룹을 기반으로 영화를 통해 각자의 예술적 연구를 해나가는 것을 골자로 한다. 총 2년 과정에 주관성, 방법론, 실험, 개념화로 나뉜 네 학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2학기 발표를 앞두고 있는데 불과 지난주까지 이 학교에서 중요시하는 ‘예술적 연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1학기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생활에 적응하며 주관성을 찾느라 헤맸다. 이번 학기에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으려 애썼다.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왔고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학교 밖에서 여행하며 쌓았던 배움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었고 글을 썼어요. 최근에는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님과 그 아래서 자란 저의 이야기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고요. 이 두 프로젝트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새로운 접근·방법론을 찾고 싶어 여기 왔어요.”

그러자 지도 교수가 물었다.

“오래된 방법론을 버리고 싶다고 하는데 무엇이 오래된 것이고 새로운 것이죠? 오래된 것은 나쁜 건가요?”

교수들은 학기 내내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짚었고, 왜 새로운 것을 찾아야만 하는지 물었다. 무심결에 나는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은 그저 나의 경험에 기초한 사소한 것이며 전혀 예술적이 아니고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그럼 예술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죠? 누가 예술가인가요? 보라씨가 한국 사회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해왔고, 여성이자 농인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의 시각으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예술 아닌가요?”

나는 어떤 주제에 접근할 때 내가 해왔던 방법을 바꾸고 싶고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은데 지난 9개월간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던데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 쉽지 않은 일이죠. 그런데 왜 습관을 버리고 뜯어고쳐야 하나요? 관점을 바꿔 자신의 습관을 가지고 방향을 바꿔 접근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자신의 습관과 기존 방법론에는 분명 장점이 있어요. 그걸 취해서 다른 방법론을 만들어볼 수 있는 거죠.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장점을 버리려고 하죠?”

교수는 내가 해왔던 이전 작업을 잘 들여다보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들이 이미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되고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그건 ‘성과물’과 ‘결과물’이 되어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는 예술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했다. 사실 자신은 나의 결과물보다 과정에 더 흥미롭다고 했다.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 그는 나에게 그것이 ‘침묵’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나 침묵의 언어를 배우고 그 사이의 행간을 읽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어왔던 비장애 남성의 언어로 말해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작업해왔고 지속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침묵의 언어가 여태껏 기억의 중심에 서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읽어내고 시각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해나갈 예술적 연구일 것이라고 말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631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2018/04/2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이 작은 나라가 겨울올림픽에 강한 줄 몰랐다. 막상 살아보니 이해가 가긴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렸을 때부터 매일같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볕 좋은 여름이 되면 풍덩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 겨울이 되어 암스테르담의 운하가 얼면 집에 있던 스케이트를 꺼내 도시 한가운데서 스케이팅을 즐기는 이들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덕분에 환경을 파괴하는 올림픽에 반대하는 나조차 평창 겨울올림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변에서 하도 “너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역사적인 순간을 놓쳐 아쉽지 않아?” 하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88 서울올림픽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게 올림픽은 너무나 먼 관심 분야였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북한 사람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때였다. 대한민국 국기 대신 한반도기가 펄럭였고 하얀색 패딩을 입은 선수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북한 삼지연 예술단의 강릉 공연이었다. 한국전쟁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며 평생을 한반도의 이념 전쟁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노래 ‘반갑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은 화면 하단을 향해 있었다. 자막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막은 뜨지 않았고 귀에 들리는 건 나의 모국어와 닮은 언어였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매일같이 보는 건 영어 자막이 있는 영상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상 또한 자막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자막 없이도 나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통일’은 어렸을 때 포스터·표어 대회와 글짓기 대회에서만 쓰던 단어였다.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김대중 정부 때 초등학교를 다니고 노무현 정부 때 중학생이었던 내게 ‘평화’는 이상하게도 아주 일상적인 단어였다. 학교에서는 우리가 아직 휴전 상태이고 그렇기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한테 편지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맘만 먹으면 비행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표어를 썼지만 동시에 북한은 빨갱이의 나라라고 배웠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통일이고 북한이었다.

언젠가 나의 스승이 이렇게 물었다. 1920년 서울역은 국제역이었다고. 서울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고.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되돌리는 것, 왜 안 되겠냐고. 나는 ‘에이, 설마’ 하고 코웃음을 쳤다. ‘통일’이라니. 이상한 단어였다.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지금도 충분히 평화로운데 왜?’ 하고 생각했던 내가 북한 예술단이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따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너무 신파적인 것 같아 울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났다. 난생처음 ‘통일’ ‘휴전’이라는 단어가 몸에 들어왔다. 사실 한번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상조차 금지된 구역. 어쩌면 내 생애 이곳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는 정말로 그 질문이 유효해진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2436.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2018/03/31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얼마 전 베트남에 다녀왔어요. 2014년 겨울에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기획을 시작한 이후 네번째 방문이었지요. 처음 베트남 중부에 도착했을 때는 ‘할아버지가 이곳 어딘가로 군함을 타고 도착했겠지’ 하며 당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베트남 중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런지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네요.

1971년 봄, 당신은 베트남 전쟁에 맹호부대 장교로 파병되었다고 했지요. 열여덟살이었던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자 당신은 베트남의 어느 도시를 가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호찌민부터 하노이까지 방문했던 도시를 쭉 열거하자, 당신은 그중 한 해안 도시를 짚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지요. 저는 그때 당신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구강암과 폐암이라고 했지요. 평소에 건강을 우선시했던 당신은 꽤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당신의 모습이 저는 좀 의아했어요. 당신은 제가 자라 베트남전에 대해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니, 사실 할머니는 “잘 모른다”고 했지요. 어렸을 적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은 기억하지만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이 왜 그곳에 갔는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둘이나 낳은 나랑 이혼하려고, 네 할아버지는 이혼비를 벌러 월남에 갔어”라고 할머니가 말하는 순간 저는 책에서 읽었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당신과 할머니의 이야기, 베트남 중부에서 학살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 저는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작업을 하는 내내 당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약 32만명의 한국군이 미국의 동맹군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그 전쟁 특수로 한국은 급속한 경제 도약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할아버지가 보낸 그 돈으로 할머니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살림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온몸이 굳었어요. 한국군에 의해 온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그 마을들의 ‘따이한’(한국) 제사에 다녀올 때마다 저의 뿌리와 이곳에서 있었던 학살의 기억이 겹쳐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밥 먹고 가라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먼저 손을 잡은 건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주머니였어요. 그녀가 내주는 밥은 베트남의 그 어떤 음식보다 따뜻하고 맛있었어요.

올해는 하미 마을과 퐁니·퐁넛 마을 학살 50주기였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는 제 손을 붙잡으며 말했어요. 사과받고 싶다고, 그 당시 가족들을 죽이고 온 마을을 불태웠던 한국군에게 직접 사죄받고 싶다고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보다 정확한 사죄, 무엇보다 당신으로부터의 사죄를 받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아니, 그녀가 해준 그 따뜻한 밥의 힘으로요.

할아버지, 곧 그 아주머니들이 한국을 방문해요. 4월21일부터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에서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서요. 월남 참전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이제는 당신이 대답할 차례예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465.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당신을 이어 말한다

2018/03/0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밤낮으로 괴로웠다. 연이어 쏟아지는 ‘#MeToo’(미투) 폭로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네덜란드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한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에 가 있었다.

나 역시 날 선 언어로 말하겠다. 이것들을 꺼내놓는 데에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 영어 선생님이 기간제로 부임했다. 그는 팝송 가사를 프린트해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팝송을 따라 불렀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뻗었다. “보라는 어쩜 이렇게 허리가 잘록할까.” 그의 손이 나의 허리에 닿았다. 아직도 그 기분 나쁜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다리를 만졌다며 변태라고 했다. 나는 그가 나를 예뻐해서 그랬다고, 쟤네들은 매일 불평만 한다고 생각했다. 열두살이었다.

여중을 다닐 때였다. 학교에 바바리맨이 출몰했다.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담벼락에 누워 성기를 노출하고 있는 그에게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뒤늦게 달려온 선생님이 어서 교실로 돌아가라며 바바리맨이 아닌, 우리를 야단쳤다. 선생님은 납치와 인신매매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며 짧은 치마를 입지 말고 남자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 그대로 ‘처신을 잘하라’고 했다. 열네살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인도를 여행하던 때였다. 배를 타고 호수를 둘러보는데 비가 내려 꽤 추웠다. 나는 배의 뒤쪽에 사공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해준다며 내 허벅지를 만졌다. 배에는 어른들도 타고 있었다. 그는 허벅지 안쪽까지 더듬고는 볼에 입을 맞추고 귀에 바람을 불었다. 그제야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황급히 배에서 내려 울었다. 나는 그가 정말로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줄 알았다. 이후 경찰서에서 대신 진술을 했던 남성 어른은 나중에 술에 취해 이렇게 말했다. “너 그때 나 없었으면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열다섯살이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던 때였다. 여성 혼자서 어떻게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해가 지면 나가지 않고요. 인도에서는 어깨와 무릎 노출이 굉장히 심한 노출로 분류되는데 그렇게 차려입지 않았어요.” 나 자신을 반성한다. 열여덟살이었다.

어느 영화제의 관객 숙소에서 몰카를 당했을 때였다. 공동 샤워실에서 씻고 있는데 창문이 열리면서 휴대폰을 든 팔이 쑥 들어왔다. 경찰서에 가 진술을 하니 “몰카를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어떻게 아냐”고 경찰이 물었다. 영화제 쪽은 시기적절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에스엔에스(SNS)에 정황을 올리니 수많은 매체에서 “여감독, 모 영화제 숙소에서 몰카 당해”라는 포르노성 제목으로 기사들을 찍어냈다. 나의 프로필 사진도 함께였다. 그 아래 ‘얼굴 봐라 꼴리지도 않게 생겼네’ ‘소라넷에 가면 있겠네’ 등의 2차 가해 댓글이 넘쳤다. 항의전화를 걸었던 한 매체의 기자는 “공인이시고 저희는 알 권리가 있죠. 기자회견 하셨잖아요.” 하고 말했다. 나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다. 고소하려고 경찰서에 가니 “네이버에 이름 뜨네. 고소해봤자예요. 매체는 보도할 권리가 있고 국민은 공인에 대해 알 권리가 있어요”라고 했다. 공인이 아닌, 스물여섯살이었다.

나는 말한다. 나 역시 방관했고 침묵했고 2차 가해를 했다. 나는 내 앞에 서서 먼저 말했던 당신들의 용기로 이어 말한다. 나 역시 방관당했고 침묵당했고 가해당했다.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441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네덜란드에서 자전거 타기

2017/01/27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며칠 전, 엄청난 강풍을 동반한 겨울 폭풍이 네덜란드를 강타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이착륙 예정이었던 항공편 268편이 결항하고 기차를 비롯한 버스, 트램 등의 교통편에 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알림을 받았다. 기상 경보는 가장 심각한 단계를 의미하는 ‘코드 레드’였다.

지난달, 폭설이 내렸을 때의 경보 단계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코드 오렌지’였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색이 오렌지색이기도 하고 ‘나는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한국에서 왔는데 뭐 폭설 정도야’ 하고 코웃음 치며 자전거를 끌고 나가서는 시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바 있어 이번에는 몸을 사리기로 했다. 물론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암스테르담의 운하와 시가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말로만 듣던 유럽의 겨울, 절경이었다.

그러나 프레임 바깥은 현실이었다. 눈은 자꾸만 내 눈 속으로 들어가 앞을 볼 수 없었고, 손은 꽁꽁 얼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는 자꾸만 미끄러져, 앞을 걸어가는 행인과 다른 자전거, 자동차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간 얼어 죽겠다 싶어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으려니 창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폭설이 내려도, 코드 오렌지 경보가 떨어져도 자전거는 타야만 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인구수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은 나라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녀노소 불구하고 누구나 자전거를 탄다. 그건 코드 레드 경보가 내려도 마찬가지다.

대학원 과정 워크숍이 있어 학교에 가야 하는데 당일 아침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었다. 이제부터는 자연의 힘을 경외하기로 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것을 포기하고 트램 정거장으로 향했다. 운하를 지나는데 그곳이 바람 골이었는지 만화 속 한 장면처럼 그만 바람을 타고 날아갈 뻔했다. 트램에 올라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어 방송이 들렸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렸다. 강풍이 불어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 트램. 노 버스. 노 트레인. 오마이갓. 학교까지는 걸어서 4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혹시 다른 노선의 트램은 운행을 하나 싶어 근처 정류장에서 다른 트램을 탔다. 그러나 또다시 운행을 멈췄다. 실소를 하며 동기에게 전화하니 이제 곧 수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도대체 너희는 어떻게 학교를 갔느냐고 물으니 자전거를 탔다고 했다. 강풍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뽑히고 자전거가 날아가는 판에 자전거를 탔다니! 이제부터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인들 역시 경외하기로 했다.

며칠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도심 한가운데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빨간색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네덜란드영화학교 대학원 과정 학장이었다. 학장이 나처럼 자전거를 탄다니! 문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당신 자전거를 타느냐’고 물으니 학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전거 타는데 왜? 네덜란드 총리도 자전거 타고 출퇴근해.”

작년쯤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정장 입고 자전거 출퇴근하는 총리’의 나라가 바로 이곳 네덜란드였던 것이다. 아, 하고 가만히 서 있자 손으로 페달을 돌려 타는, 장애인도 탈 수 있는 특수 자전거가 내 옆을 지나갔다. 그렇다. 이곳은 자유와 관용의 자전거 나라인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9564.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2017/12/3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악몽을 꿨다. 중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꿈이었다. 며칠에 걸쳐 시험을 보는데, 수학과 과학 시험을 치르다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수학 과목의 경우 겨우 한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마킹을 했고, 과학은 빈 답안지를 내야 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 어서 한 문제라도 풀라며 시간을 더 주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문제를 풀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객관식 시험을 치르고, 1학년을 다니고 그만두었던 고등학교에 복학하는 꿈은 자주 꾸는 악몽 중 하나다. 야심 차게 학교를 자퇴했어도, 졸업한 지 십여년이 지났어도,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에서 지내고 있어도 그 꿈들은 여전히 나를 찾아온다.

네덜란드 영화 학교에서의 첫 학기가 끝났다. 기말 발표를 했고, 그에 따른 연구 자료들을 제출하고 면접을 봤다. 결과는 패스, 학점이 따로 없는 구조다. 정확하게는 통과와 미달을 구분하기 위한 점수가 있지만 그것은 연구원(이곳에서는 ‘학생’이라는 호칭을 선호하지 않는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사 과정은 열 명의 동기들과 세미나 방식의 워크숍들을 함께 하며 자신의 연구 주제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발전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자신만의 속도로 연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 점수를 매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워크숍이 끝나면 강사로부터 ‘학점’이 아닌 정성스러운 ‘피드백’ 메일을 받는다.

기말고사도 마찬가지다. 면접관들은 내가 제출한 자료와 발표를 들여다보고 그에 따른 의견과 질문을 준비한다. 우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관점에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언과 같은 질문들이다. 또한 면접은 혼자 보지 않는다. 나의 연구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켜봤던 멘토가 면접에 동행한다. 그는 내가 면접을 보는 동안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있다. 이후 내가 잠시 나가 있는 동안 나 대신 대답을 하거나 추가적으로 면접관의 조언을 듣는다.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것들을 옆에서 지켜 보고 그에 맞는 멘토링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구조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면접관은 사려 깊은 격려와 함께 첫 학기 통과 여부를 알려준다. 물론 나도 관련된 질문과 피드백을 할 수 있다. 미달하는 경우, 한번 더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몇주 후 기말고사와 관련된 피드백 메일을 받게 된다. 이것이 영화 학교에서 치른 첫 학기 시험이었다.

학부 시절을 되돌아보면 매일같이 캠퍼스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운 축에 속하는 예술 학교였고,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원칙으로 학점이 매겨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출석률’이었다. 학점을 매기기 위한 가장 객관적인 지표가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성적 장학금은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캠퍼스를 뛰어다녔다. 설령 그것이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건 자연스럽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되어 악몽과도 같이 남아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악몽을 덜 꾸기를 바란다. 대신 배움과 학습에 대한 즐거운 기억들이 자리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이들이 배움에 대한 설레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5614.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유연함의 사회

2017/12/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수업시간이 10시에서 10시30분으로 바뀌었다.

이곳 네덜란드 영화학교의 석사 과정은 열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중심으로 매번 새로운 워크숍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첫째 주에는 향후 2년간 함께 공부해나갈 그룹이 중요하니 연기 워크숍을 통해 서로의 몸과 움직임을 파악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는 누가 네덜란드 아니랄까봐 배에서 나흘간 생활하며 밥을 지어 먹고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질리도록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집중적인 세미나형 워크숍이 아침 열시부터 저녁 대여섯시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스케줄이었다.

학기 중반이었을까, 동기 중 두명이 전체 수업시간을 10시30분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유인즉슨, 로테르담과 델프트에서 학교가 위치한 암스테르담까지 오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데 교통비가 비싸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을 늦추면 출퇴근 시간 이후에 적용되는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럼 무료로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열명의 학생 중 두명의 생활비 절감을 위해 대학원 수업시간 전체를 바꾼다고? 생소하고 낯선 제안이라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보낸 후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조교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동의했고, 교강사들은 우리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수업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변경되었다. 흥미로웠다.

얼마 전에는 시리아 영화감독 오사마 무함마드의 특강이 있었다. 파리에 살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에 관한 영화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을 보여주었다. 1001명의 시리아인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폭탄으로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시멘트 먼지에 뒤덮인 고양이가 다리를 잃은 채 절뚝이며 걸었고,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은 말들이 거리에 누워 있었다. 건물 사이로 총에 맞아 쓰러진 주민을 구하기 위해 긴 철사를 거리로 던지는 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들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비닐봉지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학교의 주요 강사 중 한 명이었다. 이스라엘 출신인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꽤 유명한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우리 아빠 나이뻘 되는 남성인 그는 맛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미세한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는 작은 강의실이었다. 스크린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심지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몇몇 사람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수업시간에 도시락이나 과일을 먹는 것은 이 학교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으나 이 상황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은 그는 영화 상영 중간에 나갔고, 우리는 말도 없이 사라진 그의 행동을 의아해했다. 얼마 후, 그로부터 단체 메일이 왔다.

사과문.

모두에게. 지난 특강 중 내가 무언가를 시끄럽게 먹어 충격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영화 상영 중 제가 저질렀던 저속한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면 정중히 사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알려주십시오. 저는 여전히 배우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학교 건물은 밤 9시만 되면 ‘유연함 없이’ 문을 닫는다. 모두가 퇴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갇혀 밤을 지새워야 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그럼 이만 줄이겠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169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프로불편러의 서울

2017/11/04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인천공항에서였다.

올해 여름은 유별나게 더웠는데 그건 새로 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때문이기도 했다. 귀를 덮는 차폐식 헤드폰은 말 그대로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소리에 민감한 내가 서울이 너무 시끄럽다며 고통을 호소하자, 지인이 “서울을 조용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귀를 막아보는 건 어떠냐”며 소개해준 것이었다.

가격 때문에 반년을 고민했다. 구입하고 난 후에는 고민했던 지난 반년을 후회했다. 신세계였다. 헤드폰을 끼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면 주변 소음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 건강이 회복될 정도의 소음 차단이었다.

공항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줄을 섰다. 최근 몇년 전부터 줄을 서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는데, 마치 내게 말을 하는 듯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줄을 설 때면 더 심했다. ‘빨리빨리의 민족’은 누구보다 앞서가기 위해 앞사람과 몸을 밀착하며 줄을 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고, 무사히 그곳을 지나기 위해 귀를 막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선 사람들이 자꾸만 내 가방에 몸을 기댔다. 불편했다. 어차피 한줄 서기라 밀착하며 줄을 선다고 빨리 가는 것도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몇번이고 참을 인 자를 그렸다.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몸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발을 쿵쿵 굴러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정말 소리를 지르거나 저 사람들을 때릴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가 극도로 달해 이상행동을 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헤드폰을 벗고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런 거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요. 조금만 떨어져서 서주실 수 있을까요. 몸이 너무 붙어서요.”

이윽고 나는 인천공항 미친년이 되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떨어져서 줄을 서느냐며 사람이 서로서로 이해하고 살아야지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 헤드폰을 끼고 등을 돌렸다. 미처 차단되지 못한 분노와 화가 들려왔다.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해 “죄송한데 다 들린다”고 그만하시라고 하자, 두 모녀가 바통을 주고받으며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봤고, 나는 창피하고 억울했다. 혼자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 구역 미친년이 되어 아줌마랑 싸우고 싶은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사회에서 이만큼 불편하고, 그래서 자칫하다가는 당신을 때릴 것 같으니 이만큼만 양해해달라고 했던 건데 그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참담했다. 서울에서 살아갈 만큼 충분히 무뎌지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당분간은 여기서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빨개진 얼굴로 울음을 참았고, 두 모녀는 그곳을 빠져나가기까지 나를 노려봤다. 나는 출국 도장을 찍고 그곳을 나오자마자 엉엉 울었다.

나도 안다, 나 예민한 거. 엄마도 내게 “그렇게 예민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했다. 맞다. 그래서 못 살았다. 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민감하고 까칠한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한국이었으면 좋겠다. 나 같은 프로불편러 개인주의자들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한국 사회라면 정말로 좋겠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7396.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다양성의 공간

2017/09/3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올해 봄, 네덜란드 영화학교로부터 서류 심사에서 합격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화상 채팅으로 면접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학교 측은 “우리는 그룹이 중요하기 때문에 면접을 통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 면접장에 들어서니 키가 큰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나를 반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싶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학장이 물었다.

“여기 입학하게 되면 구성원에게 어떤 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해왔고, 여기서 어떤 걸 배우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어떤 걸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고심하다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온 여성으로서 다른 시각과 관점을 나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열 명이 모였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 동기들의 간략한 정보를 받았다. 이름과 국적, 간단한 이력이 쓰여 있었다. 여섯 명이 네덜란드인이었고, 나머지 네 명이 스페인, 덴마크, 스위스, 한국이었다. 생각보다 꽤 단조로운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중동과 동유럽 사이 어딘가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스테판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8살 때 미국으로 가 10년 정도를 살았다고 했다. 국적이 어떻게 되냐고 묻자, 그는 정말 이상한 질문이라고 하며 두 손과 어깨를 살짝 올렸다.

“부모님은 유고슬라비아 사람이고, 나는 여기서 태어났지만 10년 동안 미국에 있다 온 거라 모르는 게 더 많아. 동생은 멕시코에 살고, 아빠는 하와이에, 엄마는 곧 여기로 올 거야. 네덜란드 여권을 갖고 있긴 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 국적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건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18살 때 네덜란드로 온 야핏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네덜란드 국적을 갖고 있는 리나도 그랬다. 스위스인 어머니와 네덜란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말라이나, 스위스 남부의 이탈리아 국경 부근에서 자란 조지아까지. ‘국적’으로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과 문화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나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의 것과 달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는 문장이 여기서는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냥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것’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사진을 찍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게 된 에얄 시반 감독은 워크숍을 진행하며 물었다. 누가, 무엇이 역사를 결정하는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이 논픽션인가. 그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 구분과 정의는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가.

나는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이 문화들의 레이어(층위) 속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한국에서 온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한 번 더 아시아의 관점을 주목하고, 덴마크에서 온 피터가 있기 때문에 북유럽과 네덜란드 사이의 지점을 고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룹’과 ‘구성원’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3196.html#csidx2d61c92c20c7df1b9c39faa6fbc9aae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모집 중

2017/09/02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은행 계좌도 열었고 중고 자전거도 샀다. 어제는 네덜란드의 임대주택 회사에서 공급하는 방을 계약했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한국 시간으로 밤이 되면 자꾸 잠이 온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예술대학 소속인 네덜란드 영화학교에서 석사 전공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2년간 여기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유학을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왜 암스테르담인지, 무슨 돈으로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작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쳤다. 암스테르담은 그중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고, 이방인에게 친절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영화학교의 인상이 매우 좋았다. 지도를 보다 보니 숙소 근처에 학교가 있었고, 유학을 고민하던 나는 무작정 학교를 방문했다. 학과장이 나의 대책 없는 방문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석사 과정에 대한 상담도 받았다. 그렇게 원서를 준비했고, 서류 심사에 합격해 면접을 봤다. 그들은 내게 왜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한국을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다. 책 작업도 해보고, 영화를 만들어 배급하고 개봉하는 경험도 해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자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게 되었다. 다음 작업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무엇을 기반으로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작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이 생겨났다. 일단 네트워크의 확장과 더 넓은 경험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유럽의 작업자들은 어떻게 작업을 해나가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암스테르담은 일 년에 한 번씩 규모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면접을 무사히 마쳤고, 학과장에게 축하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학교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학비는 면제받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백방으로 국내외 장학금을 알아보았지만 예술, 심지어 순수예술도 아닌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국의 경우는 꽤 있었지만 대개 자국민을 위한 것이었다. 매일같이 장학금을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모두가 국내에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했고, 정말로 그러했다. 떠나는 날이 다가왔고 결국 장학금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크라우드 펀딩을 하기로 했다. 이름하여 이길보라의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목적은 보라가 아르바이트를 덜 하고 책과 영화를 더 찾아보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 리워드는 없음. 대신 사회에 좋은 영화와 글로 환원하겠음. 그렇게 에스엔에스(SNS)를 통한 펀딩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 중 한 명이 전화를 했다. “너, 크라우드 뭐 한다며? 아니, 알바를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야지 무슨 후원을 받아, 후원을.” 그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씩씩거렸다. 나는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훔치는 것도 아니다. 빨갱이도 아니다. 다만 장학금과 생활비가 필요할 뿐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허리가 휘어지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 곳곳에는 학비가 없으며 심지어 외국인에게도 학비를 면제해주고 넉넉한 장학금을 주는 곳들이 있다. 한국의 상황이 그러하지 못하다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을 것이다. 그에게 분해서라도 더욱더 열심히 장학금을 모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공부도 유학도 꿈꿀 수 없는 세상은 불평등하다. 그리하여 나의 크라우드 펀딩은 아직도 절찬리에 모집 중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93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