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부채감의 사회

2017/08/0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열아홉 살의 나는 다큐멘터리 피디(PD)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때 본 몇몇의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중 하나는 김일란 감독의 <3×FTM>이었다. 세 명의 에프티엠(FTM, Female To Male.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을 다루는 이 영화는 내 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FTM’이라는 글자를 노트에 적었다.

동성애는 죄라고 배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를 따라 교회를 다녔던 내게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그 자체로 ‘죄’였다.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남자였다’고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날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였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다른 이의 삶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 건지,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교회로 가 동성애가 왜 죄인지를 물었고, 교회와 불화했다. 오만가지 질문이 생겨났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현장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영상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가 좋았다. 그곳에서 그들이 쌓은 친밀감과 거리는 영화 속에 오롯이 드러났다. 나는 그들을 통해 내가 가지 못한 현장을 만날 수 있었고, 영화를 통해 어떤 이의 얼굴 표정과 찰나의 순간 같은 것들을 보고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고, 동료와 스승이 필요해 대학에 입학했다. 많은 사람과 좋은 영화를 만났지만, 그것만으로 다음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다. 제작비가 필요해 여러 곳에 제작 지원 신청을 하고, 피칭을 했다. 누군가는 “학생 영화인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 그냥 찍어”라고 했다. 무수하게 떨어지고 떨어진 끝에 촬영 장비와 교통비를 마련했다. 인건비는 거의 책정하지 못했다.

미안해하며 두 번째 영화를 찍었다. 세 번째 영화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에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때에도 단 몇 번 카메라를 들었을 뿐이었다. 마음속 깊숙이 부채감이 생겼다.

얼마 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고, 박근혜 퇴진 운동의 미디어팀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비보를 들었다. 세상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 <3×FTM>의 김일란 감독님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장애인운동 현장과 세월호 유가족들의 곁을 지켰던 박종필 감독님은 간암 말기로 황망히 돌아가셨다. 그의 유언은 ‘미안하다’였다고 한다.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때 한 번이라도 현장에 더 나갈걸’ 하고 미안했고, 국가가 지키지 못한 것을 지키려다 자기가 부서지고 마는 이들에게 미안했다. 동시에 국가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왜 국가는, 시스템은 이들을 지키지 못하는가. 나는 이런 부채감을 계속해서 가져가야 하는 것일까. 나/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지키지 못해 미안해하고 싶지 않다. 미안해해야 할 주체는 국가이자 시스템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영화를 계속 보고 싶고, 그들과 함께 차별에 저항하며 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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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5589.html#csidx4bbec1a6ea42c529e4ea5b07eb05e57

한겨레 칼럼 [삶의 창] 값싼 동정과 자존감 사이

2017/07/0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농인 부모의 아름다운 세상을 딸의 시선으로 담은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지난달 일본에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에 개봉을 했으니 2년 만에 관객을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의 자녀)인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 상영 외에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가령 관객과의 대화(GV)를 위해 주인공 농인 부부가 등장했을 때 영화관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질지 고민해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어떤 관객은 극장에 갔더니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로 가득했는데 자신은 알 수 없는 그 언어 사이에 둘러싸여 ‘타자’가 되는 경험을 했다며 영화 외적으로도 생경한 체험이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그랬다. 현지 배급사는 농인 역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에 배리어 프리 자막을 삽입했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자막으로 영화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개봉 2주차에는 영화의 주인공인 부모님이 감독인 나와 함께 무대 인사를 했는데, 언어가 무려 네 가지였다. 일본 음성언어, 일본 수어, 한국 수어, 그리고 한국 음성언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절반은 일본 농인이었고, 절반은 일본 청인이었다. 영화 상영 후 무대인사 행사에는 네 명의 통역사와 장비들이 배치되었다. 무대 좌측에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회자가 있었고, 그것을 일본 수어로 통역하는 A가 있었다. 그 옆에는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엄마·아빠, 한국 수어와 한국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나, 일본 음성언어와 한국 음성언어를 통역하는 B가 나란히 섰다. 무대 뒤 스크린에서는 한국 수어를 읽어 일본 수어로 통역하는 C의 얼굴이 보였다. C는 무대의 수어를 볼 수 있도록 관객석 앞쪽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와 빔 프로젝터가 C의 수어를 실시간으로 촬영해 스크린에 투사했다. C 앞에는 일본 수어를 읽어 일본 음성언어로 통역하는 D가 앉아 있었다. 말로도, 글로도 설명하기 복잡한 시스템이었지만 훌륭한 세팅 덕분에 모두가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 관객들은 질문을 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와야만 했다. 관객석에 앉은 농인의 경우, 누군가 객석에 앉아 질문을 하면 누가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잘 말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상 보기 드문 광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질문을 했고, 네 가지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일본 농인들은 한국 농인의 삶이 그네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고, 일본과 한국의 수어가 비슷하여 놀랐다고 했다. 농인 부모와 영화를 보러 온 코다도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통역사로서의 역할, 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게 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서로 다른 네 가지 문화 사이에서 수어는 미개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몸짓이 아닌 완전한 ‘언어’가 되었고 농문화는 온전한 ‘문화’가 되었다.

한국에서 영화를 상영했을 때, 혀를 쯧쯧 차며 나와 부모를 동정하던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저는 불쌍하지 않아요” “독립영화 많이 봐주세요” 하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농인 부모를 뒀다는 이유로, 독립영화를 한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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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923.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같다 / 이길보라

2017/06/10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일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한국에 여행 온 그를 만났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가볍게 만나 커피 한잔 하려던 우리는 계획을 바꿔 밥을 먹었다. 그는 어쩌다 영화를 만들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덟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갔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 투”라고 했다. 그는 중학교 때 학교를 자퇴하고 음악을 하다, 미국으로 가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다. 흥미로웠다. 나는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그 역시 나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리턴 티켓이었다. 당장 이틀 후면 돌아가야 하는 당신을 두고 나는 이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고심했다. 우리는 다음날 다시 만나 데이트를 했고, 나는 동이 트자마자 비행기표를 사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가 사는 도쿄가 아닌 후쿠오카였다. 연휴를 맞아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그의 여정에 난데없이 사랑에 빠진 한국 여자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짐짓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타이밍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의 가족과 함께하는 유후인 온천 여행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해피 뉴 이어!” 나는 그의 가족들과 건배를 하며 새해를 맞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물세 살 때쯤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는 직업군인이었고 하루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내게 청혼을 했다. 나는 그가 좋았고, 그러자고 했다. 나는 부모에게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해 두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가 헤어지자고 했다.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모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이유를 물으니 “너의 부모가 장애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가 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에 대한 편견과 싸워 왔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관계를 그만두자고 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부모를 만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너와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이 태어날 확률이 높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최악이었다. 그러나 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그만두는 것은 신념에 맞지 않았다. 울고 또 울다 못해 악을 썼다. 그와 헤어지는 일은 그렇게도 어려웠다. 어느 날 엄마는 그와 왜 헤어졌는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지. 보라도 그렇고, 보라의 부모님도 그렇고.”

이야기를 들은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내게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마 전, 그의 어머니가 도쿄로 출장을 오셨다. 어머니는 요새 한국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일본 수어와 많이 비슷하다며 주먹을 쥐고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붙였다. “같다”라는 뜻의 한국 수어이자 일본 수어였다. 그의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한 순간,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디폴트값’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관계 맺음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데, 이거 하나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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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8196.html#csidxe2040b05035a8fea5cc5258c730330d

한겨레 칼럼 [삶의 창] 헬조선을 헬조선이라 부르다 / 이길보라

2017/05/13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지난달, 네덜란드의 영화학교 입학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눈이 파란 교수가 다음 프로젝트로 어떤 걸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헬조선과 미소지니”라고 답했다. 내가 당당하게 고유명사를 말하듯 ‘헬조선’이라고 하자, 교수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헬 뭐라고요?”(Sorry. Hell, what?)

나는 ‘헬’은 영어의 그 ‘헬’이고 ‘조선’은 한국에 있었던 왕조라며, 젊은 세대들이 왜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지 설명했다. 한국 경제의 급속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병폐가 수면 위로 하나둘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미소지니에 대해서는 한국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예를 몇개 들었다. 그들은 2017년 한국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왜 짧은 시간 동안 ‘헬조선’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몇년 전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지금의 한국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을, 유럽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호스텔은 대학(원)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내가 묵던 도미토리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에서 온 학생은 공부도 공부지만 더치(Dutch: 네덜란드인)와 연애하는 것이 무척 기대가 된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노르웨이 학생이 쉽지 않을걸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유럽에서는 바(Bar)에서도 낯선 이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다”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자 스페인에서 온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러면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데이트를 하느냐고 물었다. 같은 유럽이라도 저렇게 다르구나. 마치 ‘비정상회담’을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그들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국은?”

나는 한국에서는 호감 있는 이에게 번호를 묻는 일은 가능하지만, 스토킹 같은 일도 빈번하다고 했다. 남녀가 평등해 보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고, 2016년에 일어난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라고 했다. ‘몰카’가 어디에나 있고 맘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하자 모두들 놀란 눈치였다.

“경찰은 무엇을 하냐” “정부는 단속하지 않느냐” 질문이 쏟아졌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손이 떨렸다. 분명 이 대화는 아주 가벼운 연애 이야기로 시작한 것 같은데. 나는 왜 멀고 먼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에 와서 ‘헬조선’을 설명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못 살겠다 하면서 매번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곳에서도 한국의 뉴스를 들여다보며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왜 나의 몫인가. 어째서 부끄러움과 좌절은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자 목이 메었다.

누군가는 헬조선을 왜 자꾸 헬조선이라 부르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어도 이전과 같이 일상에서 혐오가 만연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나고 자란 이 사회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음으로 헬조선을 헬조선이라 불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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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522.html#csidx24b9ff4a0773149b11abc5b28aaf466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몰카 공화국’의 하루 / 이길보라

2017/04/1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몰카’를 당한 적이 있다. 모 영화제에서 관객 숙소로 사용하는 유스호스텔의 공용 샤워실이었다. 옷을 벗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그 사이로 핸드폰을 든 팔이 보였다. 몸을 구석으로 피한 후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알몸이라 쫓아갈 수가 없었다. 로비로 내려가 관련 사항을 신고했고, 경찰서에서 내용을 진술했다. 경찰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참고하겠지만 기기가 낡아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찰칵’ 소리를 들었는지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자 촬영 여부가 중요하다고 했다. 못 들었다고 했더니 그럼 범죄 사실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뭐라고요?”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리려고 하자, 친구들이 동영상일 확률이 크다고 했다.

진술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자, 직원은 샤워실 뒤쪽 출입구를 막았다고 했다. 나는 “재발의 가능성이 있고 범인을 잡지 못했으니 공지를 해달라”고 했다. 또한 최소한의 격리 조치를 요청했다. 그러자 다른 숙소를 알아봐 주는 건 어렵고 다른 객실 배정과 사우나 무료 이용 티켓을 주겠다고 했다. 영화제 쪽은 우리를 ‘블랙 컨슈머’처럼 쳐다봤다. 불쾌했다.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 다른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명민하고 믿음직스런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왜 경찰과 숙소 쪽은 그러지 못했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래서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몰카를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고, 많은 수가 공유되었다. 그런데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언론매체에 ‘여감독, 샤워실에서 몰카 당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대문짝만한 프로필 사진도 함께였다. 당황스러웠다. 이후 약속이나 한 듯 타 매체들이 비슷한 기사를 찍어냈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아직 용의자를 못 잡았고 2차 피해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신상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 옳으냐 물으니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 글 올리셨고, 국민들은 이걸 알 권리가 있어요.”

그 기자는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기자는 기자회견 한 거 아니냐며 거기 다녀왔다고 거짓말도 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더 가관이었다. ‘못생긴 게 지랄이다’ ‘줘도 안 봐’ ‘소라넷 뒤져보면 있겠네ㅋ’

나는 괴롭다 못해 명예훼손 신고를 하기 위해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그런데 신고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이름 인터넷에 치면 나오네요. 그럼 ‘공인’인데, 공인에 대해서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죠.”

총체적 난국이었다. 몰카를 찍은 놈도, 소극적인 대응의 경찰도, 매뉴얼이 없는 숙소 쪽도,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언론도, 인신공격성 댓글도. 모두 다 엉망진창이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지난달 31일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사인회에서 한 멤버가 직접 몰카가 달린 안경을 쓴 남성 팬을 잡았다. ‘디지털 성범죄 아웃’(DSO)에서 몰카 판매 금지 법안 제안을 했고, 지금까지 1만5211명이 참여했다. 여성들은 명민하게 대처하고 있다.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끔찍한 것은 변하지 않는 소극적인 대응, 그래서 때로는 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대응이다. 여전히 시계, 선글라스, 볼펜, 유에스비(USB)에 ‘몰카’가 달려 팔리고 있고, 누군가는 언제 어디서든 타인을 훔쳐보는 것을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한다. 나는 이 끔찍한 몰카 공화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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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0779.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자유로운 사람은 굴복하지 않아요

2017/03/1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나의 20대는 이명박, 박근혜였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간 배낭을 메고 동남아시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마주한 건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투표권이 생기니까, 그때는 꼭’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 손으로 첫 대통령 선거를 치르던 날,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대선 후보 티브이 토론에서 자신의 의견을 소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창피했다. 그렇게 며칠을 울었다. 그리고 지난 3월10일, 마침내 우리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했다. 혁명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재임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팠고, 죽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 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을 보았다. 2013년 11월21일,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EU)과의 조약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와의 경제 의존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에 모였다. 그렇게 시작된 시위는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고,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그 규모는 80만명에 이르렀다. 정부 및 경찰은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자유 투쟁은 93일간 지속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90년도에 태어난 여성들이 만든 ‘광장 여성 수비대’의 안나 코발렌코 인터뷰였다.

“저희는 1990년대생으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조국의 국경과 애국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요.”

이들은 우크라이나 의회가 집회와 시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법률(공공장소에서 마스크와 헬멧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 포함)을 통과시키자, 이에 반대하는 뜻으로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어쓰고 광장에 나갔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은 시위를 지속해 나갔고, 마침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공교롭게도 키예프 독립광장의 풍경은 겨울이었고, 그것은 2016년 겨울부터 시작되었던 한국의 촛불집회를 연상시켰다. 이후 한 시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이들은 독립국가에서 성장한 훌륭한 세대이며 자유로운 국민으로 성장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아요.”

2016년 7월, 이화여대 학생들이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농성을 시작했던 그 시점으로부터, 경찰의 폭력진압 앞에서 손을 잡고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로부터 새로운 세대들의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독립한 국가에서 태어나, 이명박-박근혜를 겪었지만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조그만 승리의 경험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마주했던 거대한 명박산성이 가져다준 정치적 무기력증과 2014년 세월호 참사로부터 비롯된 국민적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헬조선’은 불편한 것들로 가득하여 왜 나는 매일같이 ‘프로불편러’가 되어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진상 규명을 해야 할 것은 산더미인 곳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이 나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 고맙다.

얼마 전, 대통령 파면과 동시에 제19대 대통령 재외선거 신고 사이트가 업데이트되었다. 이번 선거일에는 해외에 있을 것 같아 국외 부재자 투표 신청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고양이를 키우며, 장애가 있는 퀴어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 그런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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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6975.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상대적 박탈감의 사회

2017/02/18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얼마 전, 이사를 했다. 공기도 좋고 동네 분위기도 맘에 든다. 성북구의 공공주택인 이곳엔 다양한 예술가들이 살고 있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아직은 서먹하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이들과 사니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월세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다. 으리으리하게 넓은 집은 아니어도 한동안 이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지원했지만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미안해했다.

10대 후반부터 ‘주거’는 나의 화두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고시원 지하에 살았다. 이후 기숙사로 옮겼고, 학교를 그만둔 후에는 게스트하우스의 다인실을 전전했다. 서울에 살고 싶어 하숙을 했고, 기숙사에 살았고, 자취를 했다. 보증금이 없었기 때문에 월세를 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큰돈을 떡하니 내주는 부모를 가진 이들을 시기했다. 나는 갖가지 알바를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매일 인터넷에서 방을 검색했다. 그러나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매물을 보면 볼수록 우울해졌다. ‘주거’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인생 자체가 버거웠다. 그러다 대학생 전세임대주택 사업을 알게 되었다. 지원 서류가 꽤나 까다로웠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증명해야만 신청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원을 받게 되어 기쁜 맘으로 부동산을 찾았다. “저,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 집을 찾는데요” 입을 열자마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부동산을 돌고 또 돌았다. 한 중개업자는 “안 그래도 전세가 없는데 어디서 전세를 찾냐”며 혼을 냈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래도 월세 부담이 덜하지 않냐며 부러워했다. 그래, 그렇긴 하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렵사리 구한 집에서 2년을 살고, 다른 집에서 2년을 살았다. 월세 부담을 더니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니 또 집이 문제였다. ‘주거’가 나의 10대와 20대를 짓눌렀다. 그러다 공공주택의 면접을 보러 갔다. 대부분이 나이가 꽤 있어 보였다. 40대 초반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연극을 하는데 원룸에 산 지 이십 년째예요. 모아둔 돈도 없고요.” 가슴이 무너졌다. 면접장의 분위기가 휘청, 했다. 가난을 증명하고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내가 돈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데. 차례가 돌아왔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타협을 해야 했다.

한 달 후, 입주자로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당분간은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주거의 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월세를 버는 시간에 신문을 펼쳐보며 세상 걱정을 했다. 기본소득이 왜 중요한지, 프랑스의 주택보조금 제도가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데, 하고 말하고 싶은데 입을 열 수가 없다. 친구들은 여전히 월세를 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이런 문구가 적힌 쪽지를 보았다.

<죄송한데 공시생인 것 같은데 매일 커피 사 들고 오시는 건 사치 아닐까요? 같은 수험생끼리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서요>

나는 옆 사람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 나 대신 다른 이를 탈락시키며 아득바득 살아내고 싶지도 않다. 공공주택에 살고 기본소득을 받으며 세상 걱정을 하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해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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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3125.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생리컵과 바이브레이터

2017/01/14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며칠 전, 홍콩에 다녀왔다. 함께 간 친구는 생리컵이 필요하다고 했고, 우리는 시내의 한 성인용품점에 들렀다. 매장에 들어서니 파스텔톤의 섹스 토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 커플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사장과 점원(스타일리스트라 부른다)이 새로 들어온 남성용 바이브레이터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생리컵의 종류와 색상은 꽤나 다양했다. 친구가 어떤 것을 살지 고민하자, 스타일리스트가 “생리컵이 처음이라면 재질이 부드러운 제품을 추천한다”고 말을 건넸다. 생리컵 9년 차인 나도 거들었다.

나는 19살에 처음 생리컵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지인이 생리대 대신 써보라며 보여준 그것은 가히 ‘혁명’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에 피가 고인 생리대를 차고 다니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때였다. 청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리대를 자주 갈아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무수한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딱히 대안이 없었고, 나는 생리대를 사고 버리며 자괴감을 느꼈다. 그런데 생리컵은 그 모든 고민을 날려버리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나는 단돈 4만원에 생리대를 더 이상 사지 않아도 되었고, 생리의 양과 핏빛을 체크하며 나의 몸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너무 편리했다. 세탁기의 발명이 여성 가사노동의 해방을 가져왔다면, 생리컵은 여성 해방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생리컵을 전도했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가리지 않았다. 여성에게는 ‘여성 해방’을, 남성에게는 “애인, 엄마, 누나, 여동생에게 생리컵을 선물하는 훌륭한 남성이 되라”며 사상을 전파했다. 대부분이 질 안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것을 주저했지만, 써 본 이들은 모두 여성 해방 전선에 합류했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2016년, 페미니즘의 열풍과 함께 생리컵의 시대가 도래했다. 날이면 날마다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생리컵을 예찬하는 후기가 올라왔고, 오프라인에서도 심심치 않게 ‘너 그거 알아?’로 시작하는 입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국내 생리컵 생산 업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7월,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약외품 품목 허가·신고 심사 규정에 따라 생리컵 판매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이 생리컵을 의료기기로 분류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처사였다. 그래서 많은 언니들이 다시 ‘직구’를 하기 시작했고, 생리컵 열풍은 잠시 주춤했다.

친구는 나의 추천에 따라 비교적 크기가 큰 생리컵을 구매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우머나이저’를 발견했다. 독일산 바이브레이터로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인생 최고의 오르가슴’이라는 수식어로 입소문을 탄 그것이었다. “오, 이거 봐. 대박!” 우리는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바이브레이터를 만져보며 깔깔댔다. 스타일리스트는 각각의 토이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친구에게 나의 성적 취향을 공유했고,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후련했다. 사뭇 놀랍고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한국에도 여성 친화적 성인용품점이 여럿 생겼다고 들었는데 ‘과연 헬조선에서 거리낌 없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에서 그랬듯, 누구나 수치심 없이 생리컵과 바이브레이터, 콘돔을 사러 갈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서 우머나이저를 샀고, 인류 최고의 발명품 리스트에 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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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8656.html

한겨레 토요판: 입말과 손말을 오가는 이 멋진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해

[토요판] 뉴스분석 왜?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동들, 코다가 여는 세상

2016/12/10​

이길보라 독립영화 감독·작가

이길보라(오른쪽)씨와 코다 코리아 회원들. ‘코다’를 수화로 표현했다. 코다 코리아 제공
이길보라(오른쪽)씨와 코다 코리아 회원들. ‘코다’를 수화로 표현했다. 코다 코리아 제공
▶ 청각장애인인 부모 밑에서 자란 ‘건청인’을 ‘코다’라 부릅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사이에서 살아온 이들. 이들은 말 대신 수화를 먼저 배우고 옹알이를 손으로 하며 혼란스러운 성장기를 보냅니다. 감각의 부재가 만들어낸 침묵의 세계와,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소리의 세계를 오가는 이들. 농인 부모를 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감독 이길보라씨가 코다의 세계를 전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학부모 상담이 있었어요. 다른 친구들 부모님도 모두 오셨고 우리 부모님도 오셨죠. 저는 엄마 옆에 앉아서 수어 통역을 해야 했어요. ‘현화는 정말 착해요’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유 없이 눈물이 났어요. 왜 우는지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다른 부모님들은 선생님과 아무 문제 없이 이야기하는데 나는 엄마 옆에 앉아서 수어로 통역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코다 이현화)

2년 전인 2014년 12월 한국농아인협회 주관으로 열린 <코다 토크 콘서트>에서 난 나의 것과 너무나도 닮은 이들의 생을 마주하게 됐다. 그들은 자신을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동을 일컫는 말)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저희 부모님은 청각장애인이니까 말씀하시면 제가 통역할게요.” 난 아주 오래전부터 어딜 가나 이 말을 가장 먼저 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은 당황해하며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흔들리는 눈빛 앞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어떤 이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간혹 주머니를 뒤져 오백원을 쥐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이들도 그랬다.
“경계에 있는 정체성이 싫었어요. 부모님에게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가 장애인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오기와 복수심이었는데, 저는 남들이 감히 동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어요.”(코다 한민지)
나는 코다다
엄마는 내게 수어를 가르쳤다. 검지를 코 오른쪽에 댔다가 떼며 검지를 접고 새끼손가락을 폈다. ‘엄마’라는 뜻이었다. 나는 수어로 옹알이를 하며 부모의 언어를 습득했다. 수어는 나의 모어(母語)가 되었고, 나는 손과 표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엄마는 밤이 새도록 아이에게 호랑이가 나오는 전래 동화를 읽어주었다. ‘어흥’ 하고 호랑이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엄마는 그 누구보다 호랑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두 손의 손가락을 구부려 두 볼에 댔다가 마치 호랑이가 앞발을 들며 위협하듯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 나는 마치 호랑이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내가 입을 꼭 다물고 수어로만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 애가 말을 안 한다며 나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그것을 ‘호랑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4살 때인 1993년 엄마와 함께 공원을 걷고 있는 이길보라씨. 수화로 “옥수수”라 말하고 있다. 이길보라씨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웠다. 이길보라 제공
4살 때인 1993년 엄마와 함께 공원을 걷고 있는 이길보라씨. 수화로 “옥수수”라 말하고 있다. 이길보라씨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웠다. 이길보라 제공

나는 부모로부터 수어를 배웠고, 세상으로부터는 음성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두 언어가 속한 세상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엄마는 스스로를 농문화(聾文化)에 속한 농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장애’라고 불렀고 때로는 ‘병신’, ‘귀머거리’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내가 바라본 엄마, 아빠의 세상은 너무나도 반짝였지만 그것을 설명해내기에는 두 세상의 언어가 너무나도 달랐다. 시각을 기반으로 한 수화언어와 청각을 기반으로 한 음성언어 사이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뿐만 아니라, 편견과 차별의 벽이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그 둘을 오가는 일은 고단했고 종종 외로웠다. 그것은 농인인 나의 부모도, 청인인 나의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나
2년전 닮은 생들과 첫 만남
농인과 청인 사이
입말과 손말을 오가는
우리는 ‘코다’다
올해 8월 영국 코다 캠프
세계의 코다들을 만났다
코다만 이해하는 장난에 ‘깔깔’
두 문화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일 영화 <비욘드 사일런스>(1996)의 주인공 ‘라라’도 학교를 조퇴하고 농인 부모님과 은행에 가서 “왜 적금을 찾을 수 없냐”고 엄마 대신 ‘말’해야만 했다. 또한 아버지가 눈이 오는 소리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것을 수어의 세계로 옮겨야만 했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2014)의 주인공 ‘폴라’ 역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음악적인 재능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통역을 하기 위해 집에 머무르는 선택을 한다. 드라마를 보고 싶은 엄마를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배우의 목소리를 수어로 옮기는 통역을 해야 했던 것이다. 동생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 학부모 상담을 하게 되었을 때 통역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며, 이곳에서 나는 ‘누나’가 되어야 하는지, ‘통역사’가 되어야 하는지, 혹은 ‘딸’이 되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건 단순히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세계의 코다를 만나다
궁금했다. 알아보니 세계 곳곳에선 코다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코다에 관한 공부를 하고, 코다의 경험을 나누고 있었다. 전세계 코다 네트워크(코다 인터내셔널)도 있었다. 영국에는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UK&Ireland)’가, 일본에는 ‘코다 재팬’이, 홍콩에는 ‘코다 홍콩’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한국에서 모인 코다들도 스스로를 ‘코다 코리아’라 부르며, 코다로서 살아왔던 경험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의 미래를 고민하게 되었고, 해외의 코다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코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모임을 꾸려 나가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코다 코리아는 올해 8월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여름 캠프에 방문했다. 영국의 그랜섬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열린 캠프는 3박4일 동안 코다 청소년 84명과 코다 성인 자원 활동가 20명이 함께하는 대규모였다. 캠프지에 들어서자마자 한 아이가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 코다예요?”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코다 코리아 멤버 중 한 명이 국제 수어로 우리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영어와 수어를 섞어 대답했다. 놀라웠다. 수어와 음성언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들이 내 앞에 백여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물었다. “너 코다야?” 우리는 여러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캠프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탤런트 쇼’였다. 한국으로 치면 ‘캠프파이어’ 같은 순서였는데 모두가 마치 코스프레를 하듯 집에서 챙겨 온 복장으로 해리 포터와 헤르미온느처럼 차려입었다. 그중에는 호나우두도 있었고 피카추도 있었다. 미처 옷을 챙겨 오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이제부터 자신은 ‘농인’이고 ‘수화통역사’를 연기할 것이라며 농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마치 농인처럼 말이다. 모두가 깔깔 웃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장애인 비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장애인 비하’ 코드로 읽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부모의 흉내를 내었고, 수화통역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 같은 것들을 연기했다. 코다만이 할 수 있고, 코다만이 온전히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장난이었다. 내가 속한 청인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디스코장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흥겹게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는지 손을 움직여 얼굴 표정과 함께 상대방에게 수어로 말했다.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청인이었고 동시에 농인이었다. 두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두 가지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들이 여기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농인을 위해 혹은 청인을 위해 통역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음성언어를 사용해도, 수어를 사용해도, 그 둘을 섞어 이야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해외 코다 초청강연을 준비하며
‘코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표인 마리 디몬드 역시 코다로 태어나 자랐다. 사촌들 중에도 유독 코다가 많아 어려서부터 코다 정체성을 일찍 습득할 수 있었다는 마리는 자라면서 소속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자신과 부모를 자책하거나 원망하며 자라는 다른 코다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코다 국제 콘퍼런스에 다녀온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코다의 미래 세대를 지원하기 위해 2007년부터 여러 활동들을 해왔다고 한다. 여름에는 코다 캠프를 열고, 다달이 영국과 아일랜드 각 지역에서 코다 아동들이 모일 수 있는 워크숍을 열기도 한단다. 우리는 캠프 마지막날, 마리에게 이런 놀라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나도 물론 멀리 한국에서 코다들이 찾아와준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해. 우리 아이들도 너희를 보고, 저기 아시아 어딘가에도 코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우리가 이렇게 멋진 ‘코다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고마워. 이 캠프의 아이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고, 나도 자라 언젠가는 수화통역사도 될 수 있고, 영화감독도 될 수 있고, 언어학자도 연구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또한 나도 그렇고 다른 성인 코다 자원 활동가들 역시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들을 꺼내 놓고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런 시간들이 되어 나도 너무 감사해.”
마리는 ‘수고가 많았다’는 말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도 한국에 가게 될 기회가 있다면 정말 기쁘게 아시아에서 네트워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4개월 뒤 마리는 정말 한국에 왔다.
마리는 10일 ‘서울시 청년허브 콘퍼런스’에서 ‘해외 코다 단체의 설립과 활동에 관하여’를 주제로 발표한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이 콘퍼런스는 서울시 청년허브 주최로 이달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청년허브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지속가능한 삶에 초점을 맞춘 ‘삶의 재구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콘퍼런스에선, 정치·문화예술·교육·환경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청년들의 시도와 실험 사례가 소개됐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코다 코리아는 코다 단체를 만들고 운영해오고 있는 두 명의 해외 연사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코다 인터내셔널과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코다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해온 마리는 단체의 운영과 영국 내 코다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코다 홍콩의 설립자 신디 챈은 아시아 최초의 코다 단체를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홍콩에서 코다로서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등을 진솔하게 풀어낼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어떻게 코다에 대한 인식과 지원 체계를 만들어갈 것인지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나는 코다라는 단어를 스물두살에야 처음 들었다. 그때의 내가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자리가 농인 사회와 청인 사회 사이의 어디쯤일 것이라는 거였다. 누군가는 코다가 농문화와 청문화 사이의 교집합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 자리가, 나만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더 많은 이들이 옆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확립했고, 또 다른 이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제 막 한국에서 자리를 펴고 앉은 우리는 떠듬떠듬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찬찬히 숨을 고르며 서로에게 ‘나도 코다다’, ‘나도 그랬다’며 손을 붙잡고 이 놀랍고도 찬란한 세상에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미 자리에 앉은 선배들은 두 팔을 들고 손바닥을 돌리며 반짝이는 박수를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멋진 코다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고. ‘그것이 바로 코다 정체성(CODA Identity)’이라고 말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handicapped/774097.html#csidxd833a389f0bbdcba59f94ea978f81f0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새로운 광장의 언어

2016/12/17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 작가

2008년, 열아홉살의 나는 촛불을 처음 들었다. 때는 이명박 정권이었고 나는 로드스쿨러였다. 정부의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학교를 그만두고 ‘길’에서 배움을 찾던 나는, 유모차를 끌고 도로를 행진하는 이들을 보았다. 또한 교복을 입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을 만났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왔다. 얼마간의 거리행진 후 ‘명박산성’에 가로막히면 사람들은 컨테이너 앞에 앉아 정치의 장을 열었다. 흥미로웠다.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민주주의’가 어떻게 ‘길’에서 작동하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었다. 당시 투표권도 없던 나에게 광장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로부터 8년 후, 나는 촛불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6차 집회가 있던 날, 경찰은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폴리스라인을 쳤다. 사람들은 청와대 분수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방송 차량 위에 올라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한 청년은 “지금 경찰이 하는 일을 보니 너무 자랑스럽지 않아, 직접 경찰이 자랑스러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왔다”고 목청을 높였다. 광주에서 올라왔다는 청년은 서울에서 함께 촛불을 들고 싶어 이틀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 차비를 벌었다고 했다. 초등학생부터 60대 어르신까지 모두가 ‘발언’을 하기 위해 긴 줄을 섰다. 본무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쩌면 각 길목의 자유발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장갑을 챙겨 오지 못한 나는 촬영을 하다 말고 종종 언 손을 호호 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이 이렇게 차가워서 어쩌냐”며 쥐고 있던 장갑을 벗어 주었다. 핫팩 봉지를 뜯어 주머니에 넣어 주기도 했다. 체력이 떨어져 이마에 손을 얹고 있자, 중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쭈뼛쭈뼛 다가와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펴보니, 직구까지 해서 먹는다는 녹차맛 킷캣 과자가 쥐어져 있었다.

내 옆에 선 촛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손은 시리지 않은지, 우비는 있는지 사려 깊게 들여다보던 이들은 광장의 새로운 언어를 고민한다. ‘병신년 박근혜’의 장애인 비하가 왜 잘못된 것인지, ‘닭근혜’라고 부르며 동물을 풍자의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미스 박’ 표현에 내포되어 있는 여성 혐오는 어떤 것인지 사유하기 시작했다. 디제이디오시(DJ DOC)의 촛불집회 공연 취소 역시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발언과 박근혜 퇴진 요구는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의 결정이었다. 누군가는 현장에 수어 통역이 필요하다 말했고, 어떤 이는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자막 통역으로 청각장애인의 알 권리를 보장했다. 기존의 정부와 정치체제에서는 볼 수 없던 언어들이 새롭게 광장에 등장했다.

얼마 전, 홍콩의 우산혁명 당시 수만명의 사람들이 수어로 다함께 렁춘잉 행정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영상을 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옆 텐트에 묵는 농인들에게 수어를 배웠고,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음성언어와 수화언어로 ‘퇴진’을 외쳤다. 이렇듯 새로운 광장의 언어는 가능하다. 대의민주주의가 감히 품지 못하는 다양한 광장의 목소리들을, 오늘도 광장에서 이야기하고 모색해보자. 광장의 새로운 언어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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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49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