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삶의 창] 탄핵: 박힌 것을 빼내다

2016/11/19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이러려고 한국에 태어났나, 자괴감이 들어 집회에 나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스크린 우측 하단의 수어통역 영상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지지하고 싶었다. 어제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읽은 글 때문이었다.

“정보습득 권리와 듣는 대신 볼 권리를 위해서 많은 통역사들이 자발적으로 몇몇 집회에 수어통역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탄핵의 수어. 그림 출처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

농인의 정보접근권을 위해 무보수로 수어통역을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수고에 비해 수어통역 영상은 작았고, 스크린 수도 부족했다. 정말로 통역이 필요한 이들은 군중을 헤치고 무대 가까이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 한계였다. 그럼에도 통역사들은 정부와 시민단체가 미처 보장하지 못한 권리를 위해 몸과 시간을 내어, 농인 역시 정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처음 터졌을 때였다. 날마다 새로운 소식이 ‘속보’ ‘단독’이라는 머리말을 달고 등장했다. 한국 사회의 온갖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다. 속보 기사의 활자를 읽어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비선 실세’와 같은 용어를 난생처음 접하는 농인은 과연 이 사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수어로 통역하려 애썼지만, 박근혜-최순실-최태민의 관계를 수어로 푸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심지어 낯선 ‘미르재단’ ‘정경유착’ ‘출연금’ 등의 단어는 통역하기 위해 개념 뒤로 한참을 돌고 돌아야만 했다. 게다가 ‘길라임’이라니. 마치 어려운 단어를 아이에게 설명했을 때 그 아이가 ‘왜?’ ‘그게 뭔데?’ 하고 계속 되묻고 답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농인은 시각에 기반을 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용어를 시각적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혼이 비정상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수화언어와 음성언어 사이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고심하게 되었다.

그런 엄마가 광화문에 왔다. 드디어 광장을 꽉 메운 촛불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엄마는 사람들이 어떤 구호를 외치고 있는지 귀로 들을 수 없지만, 다른 감각을 통해 정보를 습득해 나갔다. 백만으로 추산되는 군중의 얼굴과 그 표정, 근육의 미세한 떨림, 흔들리는 촛불의 그 온기까지. 엄마는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눈으로 보고 들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매일같이 영상전화를 걸어 이렇게 물었다.

<왜 대통령 그만두다 안 하다? 다음 못 박힌 것을 빼내는 것(탄핵) 해?>

엄마는 왼 주먹의 엄지를 펴서 세우고 오른 주먹의 검지와 중지를 펴서, 왼 주먹의 검지에 끼웠다가 뒤로 당기며 힘껏 뺐다. 마치 박힌 못을 노루발로 뽑는 형상이었다. 직관적이고 명료했다. 엄마는 그것을 ‘탄핵’이라 했다. 엄마 말대로 잘못 박힌 못이 있다면 뽑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나/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통역하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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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0947.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나는_낙태했다

2016/10/22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나는 낙태를 했다. 나의 어머니 또한 낙태를 했다. 나의 할머니 또한 낙태를 했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지우라고 한 아이였다. 첫째였는데 여자아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태어난 1990년에는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으로 남아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116.8명에 이르렀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며 순전히 당신의 결정으로 나를 낳았다. 나의 위아래로, 그리고 동생의 아래로 세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다 자란 나에게 자신의 낙태 경험을 이야기하기까지, 엄마에게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 역시 멀쩡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딸도 낳고 아들도 낳았지만 아들 둘 모두 청력을 잃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다. 아들을 낳았지만 장애아는 ‘남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한 번 더 딸을 낳았던 그때, 할머니는 아이를 안고 산을 올랐다. 그 후로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몇 년 전, 나도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심장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축하한다며 이제부터 포토북을 만들겠다고 가격을 알려주었다. 내가 눈물을 터뜨리며 계획이 없다고 입을 열자, 그는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악몽에 시달리다 찾아간 다른 병원에서는 다짜고짜 약을 줬다. 내가 수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하자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병원을 알아보았다. 낙태는 불법이기 때문에 정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겨우 찾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는 몇십만원의 수술비를 현금으로 내야 한다고 했다. 영양제는 옵션인데 이후 임신 계획이 있다면 권장한다고 했다. 돈이 별로 없었다. 비참했다. 수술대에 누웠고 손과 다리가 묶였다. 차가운 수술 도구가 몸에 닿았다. 끔찍했다. 얼마 후,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회복실에 누웠는데 그곳 역시 너무 추워 벌벌 떨었다. 마취가 풀리자마자 그곳을 나왔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어 버스에 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이 없어 약을 타오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안의 연속이었다. 체력은 급속히 떨어졌고 무수히 많은 악몽을 꾸었다. 이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대다수 여성이 낙태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엄마가 그랬듯, 할머니가 그랬듯. 그런데 이것은 왜 ‘말’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 낙태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고 비싼 수술비를 모으고 이후 수술이 잘되었는지도 모른 채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왜 전부 음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불법 낙태 수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한 정부의 입법예고안과 현재의 ‘낙태죄’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인가? 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드는가? 가장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정부가 아닌 ‘나’다. 그 누구도 나의 비참함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입을 틀어막고, 나의 자궁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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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6761.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비정상 가족의 차례 폐지 혁명

2016/09/24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이제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집안의 유일한 장남인 동생이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해서 집에 내려가지 못한다고 했다. 집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 작은아빠, 사촌동생 두 명이 있었다. 할머니는 머리를 더 짧게 자른 나를 보고 “외국을 많이 다니더니 이제는 정말 외국놈 같으다”라고 했다. 나는 ‘외국년’이 아니라 ‘외국놈’이냐며 깔깔 웃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와 엄마, 아빠가 분주하게 상을 차렸다. 맏며느리인 엄마는 일주일 내내 준비한 음식을 내어놓았고, 할머니는 손짓과 입 모양을 동원하여 간장이 빠졌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수어로 통역했다. 아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례에 대한 책을 보고 있었다. 또 잊어 먹었냐며 할머니는 아빠에게 핀잔을 줬지만, 농인(聾人)인 아빠는 그것을 들을 수 없어 껄껄 웃기만 했다.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차례상이 차려졌다.

“보라야, 네 엄마한테 통역 좀 해라. 예전에는 이렇게 속이 훤히 비치는 송편을 쓰면 안 되고 하얀 송편을 써야 했어. 그런데 이제는 간단하게 치르니까, 그냥 둬.”

엄마는 깜짝 놀라 “그럼 이 송편을 치우고 다른 것으로 가져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새끼손가락을 턱에 대고 두 번 댔다. ‘괜찮다’는 수어였다.

“보아!”

아빠는 어색한 발음으로 나를 불렀다. 차례를 지내려면 양쪽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동생이 없으니 내가 대신 서라는 것이었다. 난생처음이었다! 이제는 집안에 남자가 없어 내가 차례를 지내게 되다니! 내가 엉거주춤하며 술을 따르자 뒤에서 보고 있던 사촌동생 둘이 깔깔 웃었다. 할머니는 제사상 앞에서 왜 그리 소리 질러 웃느냐고 야단을 쳤다.

“할머니, 얘네 둘이 깔깔 웃어도 어차피 여기 다 농인이라 못 들어. 할머니랑 나만 괴로운 거야.”

나는 입과 손을 동시에 움직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정말 엉망진창인 집안이었다. 이제는 거동이 어려운 할머니와 사회적으로 ‘청각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엄마, 아빠, 작은아빠, 사촌동생 둘. 연휴에도 일하느라 내려오지 못한 동생.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외국년인지 외국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년까지. ‘정상’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 후, 할머니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가에서 온 고모는 중대한 안건이 있다고 했다. 내용인즉슨, 이제부터 명절에 차례 지내는 것을 그만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그것을 통역했다. 그러자 모두가 숨죽이며 할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할머니는 “이제 오래 이동하는 것도 힘들고 해서 그만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아빠는 “적극 찬성”이라고 발음하며 수어로 ‘오케이’라고 했다. 맏며느리인 엄마는 눈치를 보다가 괜찮다고 했고, 아빠는 조상님이 화나서 천벌을 내리면 어쩌냐고 웃었다. 일사천리로 모두가 긍정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헐, 대박!”

나와 사촌동생의 환호성으로 안건이 가결되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괴로웠던 것이다. 명절이라 비싼 제수를 장만하느라 큰돈을 쓰는 것도, 유전자변형식품(GMO) 식용유로 전을 부치고 그것을 먹는 것도, 귀성길에 차량 정체로 스트레스 받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이제부터 기제사만 지낸다. 대신 명절 전에 모여 성묘를 하고, 연휴에는 모두가 행복한 여행을 할 것이다. 비정상 가족의 가장 비정상적인 결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가장 정상적인 결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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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2488.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우리나라 사람’, 코다를 만나다

2016/08/20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아빠는 농인 국제 교류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 농인이 세계 곳곳을 수어로 소개하는 내용의 비디오를 보며 외국의 농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건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한국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이 아니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수어가 다르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나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영국의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캠프에 들어서자 100명 남짓한 코다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영어와 영국 수어, 국제 수어와 한국 수어를 섞어 소통했다. 나는 내가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정체성을 지닌 코다였다.

저녁 프로그램은 탤런트 쇼였다. 누가 영국 아니랄까 봐 해리 포터 분장을 한 아이가 있었고, 옆에는 헤르미온느도 있었다. 줄무늬 옷을 입은 월리도 있었고, 호나우두 가면을 쓴 소년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농인의 소리가 들렸다. ‘이 캠프에 농인이 있었나?’ 하고 쳐다보니 아까 음성언어를 사용하던 남학생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농인이 수어를 할 때 내는 소리를 냈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암 데프”(I’m Deaf)라고 말하며 검지와 중지를 펴 귀와 입에 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수어로 대답했다. 마치 농인들처럼 말이다. 당황한 우리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탤런트 쇼에서 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아 ‘농인인 척’을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흉내가 얼굴 표정, 유창한 수어, 문장의 내용, 발음까지 어디 하나 어색한 곳이 없었다. 놀라웠던 것은 아무도 그 행위를 장애인 ‘조롱’이나 ‘비하’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역할 놀이’였다. 친구와 대화하다 갑자기 부모를 흉내 내고 농인인 척하는 일. 그것을 나쁜 의미의 ‘장애인 흉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도 종종 부모의 흉내를 낸다. 아빠가 나를 혼낼 때 쓰는 “뻡!”이라는 소리를 가성을 섞어 내고, 농인이 주로 사용하는 문장을 따라한다. 하지만 오로지 동생과 나 사이에서만 가능했다. 부모를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역할 놀이’인 것이다.

캠프 이후, 코다 언니와 런던의 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수어가 모어고, 두 번째로 음성언어를 배운 이중 언어 사용자였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언니에게 손을 흔들어 수어로 말했다. 또한 음성언어로 긴 문장을 만들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이유에서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수어와 음성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며 눈을 보고 대화했다. 목 아프게 계속 음성언어로 대화할 필요가 없었고, 상황에 따라 훨씬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언어를 바꿔가며 사용했다. 그 놀이에 재미가 들린 우리는 농인들이 사용하는 문장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짧게 수어 얼굴 표정 입 사용 좋아. ‘아’(청인)들 맨날 말 길게 불편”

“맞다구 정말 입 왜… 손 하다면 편하고 재밌고 좋아”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걸 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두 가지 언어와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는 이를 만나는 것,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과의 소통. 그것이 나에게는 ‘코다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제야 ‘우리나라 사람’을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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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7531.html

한겨레 칼럼 [삶의 창] 나는 코다다

2016/07/23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나는 코다(CODA)다.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농인(청각장애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일컫는다. 엄마, 아빠는 내게 수어를 가르쳤고 나는 손으로 옹알이를 했다.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가 나의 모어였고 부모의 문화인 농문화가 나의 성장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청각장애인’이라고 부르며 쯧쯧 혀를 찼다. 그것을 아주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던 나는, 살아남기를 택했다. 엄마, 아빠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착한 장애인’이 되었듯, 나 역시 ‘착한 장애인의 딸’이 되었다.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는 것이 그 올바른 예였다.

그런데 스물두살이 되어서야 나처럼 오기를 품고 살아왔던 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들은 나 같은 이들을 코다라고 부르고, 코다의 경험은 세계적으로 비슷하며, 외국의 경우 관련 연구와 지원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의 세상을 끊임없이 부정하다가도 사랑했던, 동시에 부모의 통역사이자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던 이들을 만났다. 아빠 대신 부동산에 전화해 전세와 보증금을 묻고 통역해야 했던 열살, 엄마와 함께 은행에 가 우리집의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어야 했던 아홉살, 부모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어떤 어른의 말을 부모에게 통역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았던 열한살,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길을 걷다 마주친 엄마를 외면했던 열다섯살. 부모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이었다. 우리는 모임을 만들어 ‘코다 코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코다라는 것을 인정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이 나라를 벗어나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도 굳이 오기를 품고 살지 않아도 되는 코다들이 있다. 코다 영국(UK), 코다 홍콩, 코다 일본(Japan), 세계적으로는 코다 인터내셔널이라는 조직이 있다. 우리는 그중 코다 영국을 방문해 이 단체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어떤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여름에 열리는 코다 캠프에도 참가하기로 했다. 다른 캠프들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안내문을 보니 무려 84명의 청소년 코다와 20명의 성인 코다 자원활동가들이 참여한단다. 그들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33살이고, 우리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농인이야. 나는 영국 수어에 능숙하고, 이 캠프에서 더 많은 코다를 만나고 싶어.”

“나는 천체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코다야. 우리 코다 식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 무척이나 기대돼.”

엄청난 자기소개였다. 이들은 자신을 코다라고, 부모가 농인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존감’의 확연한 차이였다. 어딜 가나 장애인 접근권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는 공공기관을 비롯해, 연극을 보더라도 수어 통역을 신청하고 제공받을 수 있는 영국 사회, 그 안에서 자란 코다들의 정체성과 자존감 말이다. 농문화와 청문화 사이를 오가며 자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한국 내의 또 다른 다문화 코다. 그들이 스스로를 코다라고 명명할 수 있으려면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어쩌면 곧 방문할 영국에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짐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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